지난해 필자가 모 외국어고에서 진행된 영어 토론 수업에 참관했을 때 경험이다. 외고생들이어서 그런지 거의 원어민에 가까울 정도로 발음이 완벽했고, 문장 표현 또한 뛰어났다.
특히 발음만큼은 하버드 학생 수준 이상 이었다. 학생들의 영어 실력에 경이로움을 느끼며 맨 뒤 자리에서 토론을 경청했다. 그러다가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토론 참가자 중에 남의 주장을 잘 정리해서 자기 주장에 활용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이다. 상대방의 주장은 요리로 치면 양념에 불과하고 주 요리는 자기 주장이었다.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데도 말이다.
토론은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 있는 자리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주장 보다는 남의 의견에 중심을 두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수용할 것은 수용하는 게 토론의 기본이다. 그러나, 이 토론은 외국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는 ‘자기 주장 늘어놓기’에 불과할 뿐이었다.
물론 토론을 통해 자신이 주장하고 설득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토론은 상대방의 주장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 토론에 잘 활용하고, 자신의 주장을 상대방 입장에 근거해서 효과적으로 펴나가는 게 토론의 기술이다. 권위를 내세워 강요해서도 안되고, 무조건 자기 입장 만을 고집스럽게 떠들어서도 안 된다.
두 번째는 하버드 학부 수업 시간에 있었던 경험. 보통 30명 정도로 구성되는 하버드 수업에는 한국 학생들이 대학생 본과 대학원생을 합쳐 3~5명이 들어온다. 케네디 행정대학원이나 경영 대학원처럼 대형 강의가 많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열심히 참여 할 수 밖에 없다.
지난 칼럼에서도 말했듯이 ‘노트 정리 형’ 공부를 해온 한국 학생들은 ‘핵심’을 빠르게 눈치채는 능력이 다른 나라 학생들에 비해 탁월한 편이다. 핵심을 이미 알아챈 한국 학생들은 별로 질문할 것이 없어서 인지 주로 뒷짐을 지고 있는 편이고, 좀 더 폭넓게 공부한 학생들은 혼자 공부한 것과 수업시간에 교수로부터 배운 것을 연결시키기 위해 좋은 질문을 가끔 던지는 편이다. 수업 시간에 엉뚱한 질문을 많이 하는 학생들은 주로 미국인들이었다. 미국 학생들은 이해가 잘 가지 않으면 눈치 보지 않고 바로 손을 들어 그 자리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질문의 내용이 너무 핵심에서 벗어날 경우 교수님은 버럭 화를 내시면서 핀잔을 주기도 하지만, 질문한 학생은 그다지 창피해하지는 않는다
세 번째 경험은 1998년 워싱턴에서 북한 핵개발 관련 세미나에서였다. 한국 최고 명문대학의 국제학 대학원 교수가 주제 발표는 하는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논문 발표 시작부터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고 그냥 읽어 내려가는 게 아닌가! 필자를 포함에 그 자리에 모인 60여명의 방청객들이 질문을 던지려고 한 던 참이었다. “질문이 없는 관계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고 말하고 자리를 내려왔다.
그 모습을 바라 보면서, 그 교수는 미국에서 학위를 어떻게 받았는 지, 명문대 교수로 어떻게 임용이 되었는 지, 세미나 경험이 한번도 없는 지, 또 어떻게 그럴 수 있는 지 등으로 머리 속이 온통 혼란에 휩싸였다.
필자는 이러한 경험을 통해, 우리가 영어를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영어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고 있다. 영어를 공부하는 각자 나름대로 목표가 있을 것이다. 혹자는 영어를 잘 알아듣기 위해서, 혹자는 자신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 혹자는 막연하게 국제화 시대에 필요하니까 등등을 말할 것이다.
첫 번째 사례로부터 필자는 영어는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유용한 도구’이지만 그보다는 타인을 이해하고 설득하면서 세계화 시대에 ‘더불어 살아가는 언어’이어야 한다는 점을, 두 번째 사례에서는 ‘핵심’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단순 편협함에서 자신의 사고를 타인을 통해 폭넓게 넓혀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마지막 사례에서는 영어는 독백의 수단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쓰는 사회적 언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윤태형 <청소년 대상 영자신문 ‘영 타임스’ 편집국장 www.youngtimes.com>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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