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에 무지한 일반인들에게 의료 사고는 재앙이다. 의료 사고임이 명백한 경우라도 막상 법적 다툼으로 이어지면 그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알 수 없는 의학 용어들에 기가 꺾인 피해자의 가족들은 전문성으로 무장한 병원과 의료전문가들과의 싸움이 힘에 부칠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힘없는 의료 사고 피해자들을 도와 줄 정부나 민간단체의 도움의 손길은 여전히 먼 곳에 있다.
늦깎이 부부인 강명일(가명ㆍ39ㆍ자영업)씨 부부. 신혼의 단꿈이 채 가시지 않은 결혼 2년차에 쌍둥이를 임신했다.
강씨의 아내(41)는 ‘고령임신’을 한 상태였지만 평소 건강한 체질이어서 그 날의 불행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죽음의 그림자가 아내에게 다가온 것은 분만을 앞둔 마지막 정기검진 이틀 전이던 지난해 12월8일 새벽. 아내는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며 복통을 호소했다.
병원으로 옮겨진 아내는 오전 7시쯤 주치의로부터 “혈압이 잠시 높았지만 별 이상 없으니 퇴원하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날 새벽 강씨 아내의 혈압은 128과 230사이를 급격히 오가는 등 심각한 임신중독증의 증상을 보였다.
강씨의 아내는 이날 오후 7시께 집에서 의식을 잃었고, 한 대학병원으로 옮겨진 지 수 시간 만에 쌍둥이를 제왕절개로 세상에 내 보낸 후 뇌출혈로 세상을 등졌다.
의료사고를 확신한 강씨는 장례 후 당시 진료 상황을 챙기는 등 소송 준비에 들어갔다. 강씨는 이제 얼마 있지 않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병원측을 상대로 지루한 다툼을 벌여야만 한다.
그러나 강씨는 이 싸움이 결코 녹록치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의료 사고가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를 해결해 줄 법적 장치는 십 수년 째 정비가 미뤄지고 있다. 의료사고 피해자들은 나홀로 소송을 할 수 밖에 없고, 이 싸움은 승산이 그리 높지 않다.
대법원에 따르면 의료 과오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지난 99년 508건에서 2004년 820건으로 급증했다.
또 한국소비자보호원에 2005년 한 해 동안 접수된 의료서비스 피해구제 건수는 총 1,093건. 이는 885건이 접수된 2004년에 비해 23.5%가 늘어난 수치다.
소보원이 처음 의료분쟁 업무를 시작한 1999년의 271건에 비하면 7년 사이에 무려 4배나 그 규모가 커진 것이다.
의료사고 피해자들이 급증하고 있지만 이들이 병원측에 대응할 수 있는 장치는 3가지 뿐이고, 그나마도 피해자를 온전히 구제하기에는 제도적인 허점이 너무 많다.
첫째는 의료 분쟁의 조정을 위해 중앙과 16개 시ㆍ도 산하에 설치된 의료심사조정위원회에 조정을 신청하는 것.
보건복지부의 ‘2002년~2005년 의료심사조정위원회 조정신청 현황’ 에 따르면 이 기간 동안 위원회에 접수된 의료 사고 조정신청은 모두 58건이지만 단 4건이 조정에 이르렀다.
의료심사조정위원회가 비상임 위원들로 운영되고 있고 조정 결과도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위원들이 의료기관에 출석을 요구할 수 있지만 반드시 위원회의 요청에 따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조정 자체가 잘 이뤄지지를 않는다” 고 밝혔다.
다음으로 소비자보호원에 구제 신청을 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이 또한 법적인 강제력이 없는 소송 전 조정 절차에 그치는 것이어서 실질적으로 피해자가 금전적인 배상을 받는 경우는 전체 건수의 절반에 그치지 못한다.
마지막이 민사소송에 의한 재판 결과를 기다리는 것. 민사소송의 원칙상 피해자가 병원측의 의료 과실을 규명해야 하기 때문에 의학에 문외한인 일반인들은 여기서 커다란 벽에 부딪친다.
비록 의료전문 변호사들이 있다고 하지만 수임료가 비싸 의료 사고로 금전적인 위기에 몰린 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다.
의료 과오로 인한 손배 청구소송 처리 결과를 보면 아직까지 병원과의 싸움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대법원에 따르면 2002년 총 접수건수 671건 중 원고가 이긴 경우는 10건. 2004년에는 802건 중 불과 8건만 사고 피해자의 손을 들어줬다.
이렇듯 의료분쟁 사건에서 피해자의 입지가 불안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정치권은 지난 1989년부터 수 차례 의료분쟁조정법안을 마련했지만 이를 둘러싼 이익 단체들과 부처간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말 열린우리당 이기우 의원이 발의한 ‘의료사고 예방 및 피해 구제에 관한 법률안’도 검토 조차 되지 않고 계류 중이다.
이 법안은 의료 사고가 일어났을 때 의료기관으로 하여금 과실이 없었음을 입증토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복지부 관계자는 “지금까지 발의됐던 분쟁조정법안들이 상설 피해구제위원회를 구성해 피해자들을 신속하게 구제토록 하고, 의료기관의 무과실 사고에 대해서도 국가가 보상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지만 기획예산처, 법무부, 의료기관 등의 반대에 부딪쳐 통과가 미뤄져 왔다” 고 말했다.
양홍주 기자 yanghong@hk.co.kr
■ 의료사고 이렇게 대처하세요
‘의료사고’라고 생각되는 순간, 피해자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환자가 살아있다면 우선 병원을 옮기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다른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는 과정에서 이전 병원의 의료 과실 여부가 좀 더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환자가 사망한 경우라면 경찰에 변사사건으로 신고, 부검을 받는 것이 좋다. 부검을 해야만 의사 과실과 환자 사망의 인과 관계를 찾아낼 수 있다.
이외에 의료사고가 의심된다면 보호자는 당시 진료 과정의 여러 기록, 정황 증거 등 객관적 자료를 확보해 둬야 한다.
우선 의사를 만나 치료 상황과 당시 정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요구하고, 이때는 대화를 녹음하거나 객관적으로 듣고 메모할 제3자를 대동하는 것이 좋다.
또 사고와 관련된 수술기록지, 경과기록지 등의 진료기록(차트)를 복사해둬야 한다. 이 기록들은 환자측이 원할 경우 병원이 제공하도록 법으로 규정돼 있다.
그리고 환자, 보호자도 나중에 사고 정황에 관련해 정확한 기억이 안 날 수 있으니 의료 사고 당시를 최대한 세밀하게 기억해 ‘사고경위서’를 작성해 놓는 것이 필수다.
의료소송 전문 법무법인 한강 홍영균 변호사는 “감정을 못이겨 병원측에 폭력을 행사하게 되면 손해배상 소송에서 불리해진다”고 충고하고 “또 섣불리 합의를 했다가는 후일 충분한 보상을 못 받게 되는 경우도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주희 기자 orwell@hk.co.kr
■ 전산화가 의료사고 새 원인?
모 종합병원 정신과 의사 A씨는 최근 자신이 치료 중인 한 할머니로부터 “처방한 약을 먹으면 먹을수록 졸리다”는 호소를 들었다.
처방약의 성분을 보면 그럴 리가 없는 데 생각하면서도 진료 기록을 다시 확인한 순간 아찔해졌다. 전산으로 처리되고 있는 진료 기록이 할머니 것과 불면증 환자의 것이 바꿔져 있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A씨는 주변에다 “내가 메스를 드는 의사가 아니어서 천만다행이지 정말 큰일날 뻔 했다”고 말하며, 의료기록 전산화에 대한 위험성을 알리고 있다.
최근 의료업계에서는 병원 전산화가 의료 사고의 새로운 원인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우선은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이 전산화 프로그램에 미숙하거나 개발된 지 얼마 안된 전산 자체의 오류 때문에 각종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 종합병원에서는 의사가 환자에게 1시간당 수액 100㎖를 투여하라고 전산으로 간호사에게 처방전을 내렸지만 당시 전산을 업데이트시키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겨 이 지시는 시간당 200㎖로 잘못 전해지는 사고가 난 적이 있다.
또 전산개발자들이 의사와 간호사간에 이뤄지는 복잡한 지시와 실행의 메커니즘을 전산화에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한 종합병원 관계자는 “아직 외부에 알려질 정도로 큰 사고만 없었을 뿐이지 전산 오류로 인한 조그만 사고들은 꽤 발생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고주희 기자 orwe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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