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년째다. 96개월…. 화장지는 480통을 썼다. 하루에 두 번 똥을 싸고, 한 번 밑을 닦을 때 50미터짜리 화장지에서 30센치를 쓴다. 하루에 60센치를 밑 닦는 데 쓰고,(후략)”
철저히 외부와 격리돼 목숨을 부지해 가야 하는 어떤 사내의, 처절한 중간 결산이다. JT컬쳐의 연극 ‘올드 보이’는 소극장 공간이 연극이라는 매체를 통해, 우리 시대의 문화 코드인 엽기성과 대중 문화를 어디까지 결합시켜 내는가에 대한 실험장이다.
1997년 일본에서 나온 동명의 만화로 빛을 본 뒤, 2004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따냈던 작품은 이제 연극팬들의 검증을 눈앞에 두고 있다. 느닷없이 사설 감옥에 끌려 간 남자가 펼치는 스크린상의 처절한 복수극이 무대라는 현실 공간에서 어떻게 압축되고 형상화할 것인가? 그보다, 작품의 유명세를 이 작은 무대가 어떻게 감당해 나갈 것인가?
그 사내, 무태천의 독방에 놓여진 몇몇 알량한 물건들은 현대 소비 사회를 압축한다. 침대, 트랜지스터 라디오, 섹스 인형, 좌변기 등 사설 감방에 놓인 소도구들은 현대인들의 욕망 코드를 압축한다. 이 연극은 그러므로 모든 것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고, 욕망이 난무하는 이 후기자본주의의 악몽으로도 읽힐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 오대수(‘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의 약자)가 무태천이라는 차력사로 바뀐 것은 영화와의 가장 큰 차이다. 또 초등학교 시절의 사소한 기억에서 출발한 복수극이 엉뚱한 결과를 야기했다는 설정, 고문으로 손가락 등 신체가 잘려지는 모습 등 몇몇 상황은 영화에서 익히 보던 잔혹성이 연극 무대에서 어떻게 표현돼야 할 지를 두고 고민한 결과다.
극에서 등장하는 언어는 상상력의 기저부를 자극한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이다.
“주걱으로 눈탱이를 찔러서 눈알을 빼 버렸더라구요. 아직도 주걱이 그대로 꽂혀 있네ㆍ쟤는 뺀찌로 혓바닥을 뽑아서 쟤, 평생 벙어리로 살아야 돼요.” 또 탁자에 올린 손바닥을 드라이버로 찍는다거나, 새끼손가락이 가위에 잘려 쓰레기통에 떨어지는 장면 등 폭력성은 도를 넘는다. 혹은 복종의 표시로 발가락을 핥는다던가 하는 대목은 그 폭력적 선정성이 과도해 차라리 비현실적이다. ?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 시리즈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만화적 폭력성을 언뜻 연상케 한다. 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과 연극의 특정 토막은 기시감(旣視感)을 자극하기에 족하다.
강남의 극장 유에서 쭉 작업 해 온 연출자 김관 씨의 순발력과 감성이 큰 변수로 작용하는 무대다. 김씨는 “비틀어진 세상을 비틀린 무대에서 자신의 눈으로 보며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관심은 괴퍅한 팔자에 농락되는 남자를 몸으로 재현해 낼 배우가 누구냐는 것. 지난해 12월까지 4차에 걸쳐 700여명의 경쟁자들과 각축을 벌인 추상록과 김정균에 쏠린 관심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작고한 배우 추송웅의 아들이자 배우 추상미의 오빠로도 잘 알려져 있는 추상록, KBS 공채 14기 탤런트로 TV와 연극 무대를 넘나드는 김정균 등은 번갈아 무태천을 연기하며 진검 승부를 펼친다. 최경원 리민 류진 등 출연. 3월10~4월30일 우리극장. 화~금 오후 8시, 토 5시 8시, 일 3시 6시. (02)745-0308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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