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초등학생 살해 사건을 보며 충격과 분노, 가슴 미어지는 비통함을 느낀다. 더욱이 지난 15년간 반성폭력운동을 해온 활동가로서 ‘우리가 지금까지 무엇을 해왔나’ 하는 자책감과 송구함이 앞선다. 우리 사회는 희생된 어린이와 가족에게 어떤 위로의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인가.
안타까운 것은 이처럼 성폭력으로 인한 ‘죽음과 죽임’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1991년에도 한 여인이 21년 전 자신을 강간한 이웃집 아저씨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그 분이 법정에서 외쳤던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짐승을 죽였습니다”는 절규는 아직도 귓전에 생생하다. 요즘도 한 달이 멀다 하고 보도되는 성폭행 후 피살, 자살, 또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폭력을 어떻게 근절할 수 있을 것인지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현재 정치권과 각 부처에서는 이번 사건 이후 성폭력 근절을 위한 각종 대책들을 쏟아내고 있다. 어린이성폭력 가해자 가중처벌, 성범죄자 신상공개제도 확대, 야간통행금지 신설, 교정교육 확대, 공소시효 소멸, 전자팔찌법 제정, 심지어 화학적 거세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들기에 앞서 무엇이 문제인지부터 차분히 짚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에 몇 건의 성폭력이 일어나는지 구체적인 통계는 없다. 다만, 매년 1만2,000여 건 정도가 경찰에 신고된다는 통계가 있을 뿐이다. 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고 이후 제도적 장치들이 보완되어 왔음에도 여전히 성폭력범죄 신고율은 6.1%로 추산된다. 이 중 45% 정도만 기소가 되는데, 재판부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위에서 거론되는 제도들은 실제 수많은 성폭력범에게 적용되기보다는 아주 소수의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왜 94%의 피해자들은 고소조차 하지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뭔가 당할만 했겠지”, “유발한 것 아니냐”는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회의 시선들은 피해자를 더욱 더한 고통으로 몰아넣는다. 또한 용기를 내어 고소를 하더라도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잘못된 성폭력에 대한 통념이 담긴 조사와 신문관행, 반복되는 진술, 주변인들의 소문 등으로 2차 피해를 입는다. 피해자들은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로 고소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호소한다.
수사와 재판과정의 전면적인 개혁이 우선되어야 한다. 최근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의 공판중심주의 방향이나, 법원과 검찰의 불구속수사 원칙 경향에는 피고인의 인권에 가려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가 전혀 고려되고 않고 있다. 또한 전국의 140여 성폭력상담소에서 지원하는 사건의 수사와 재판과정을 모니터링한 결과를 보면 피해자의 권리인 진술녹화나 신뢰관계인의 동석제도가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폭행과 협박이 있었는지, 심지어 피해자의 이전의 성력은 어떤지 등을 집요하게 묻는 인권침해까지 발생하고 있다.
피해자들이 인권을 존중받으며 수사와 재판을 받고 가해자들은 벌을 받는 ‘상식적인 사회’일 때 성폭력 고소율도 높아지고 범죄율도 줄어들 것이다. 지금처럼 성폭력 피해자가 오히려 비난받고, 무고로 역고소를 당하는 사회, 보복과 재범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성폭력 피해사실을 말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성폭력 문제 대처에는 일시적인 관심이 아니라, 좀더 체계적이고 성숙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미경<한국성폭력상담소장>한국성폭력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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