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 추기경 시대를 맞은 한국 가톨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일단 교계 안팎에서는 한국 가톨릭이 대외적으로는 아시아 지역 선교에 매진하고, 대내적으로는 생명, 가정, 환경 문제 등에 더욱 천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이 가톨릭 사업에 가급적 관여하지 않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앞으로는 정진석 추기경의 역할과 비중이 커질 수 밖에 없는데, 아시아 지역 선교와 생명 문제는 그의 평소 지론이기 때문이다.
정 추기경은 23일 가톨릭 교계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 “한국 교회가 아시아 선교를 위해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실제 아시아 지역에서 필리핀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정도의 교세를 갖춘 나라가 없다.
이 때문에 정 추기경은 대주교로 있던 올 초 베트남과 방글라데시 출신 신학생 2명씩을 초청, 사제 양성을 시작했다. 앞으로 몽골 등지의 신학생도 불러 사제로 키울 계획인데 비용은 모두 서울대교구가 부담한다. 정 추기경은 최근 “국내에 아시아 출신 외국인 노동자가 많기 때문에 이들 국가 출신의 사제를 우리가 양성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말한 바 있다.
생명과 가정 문제에 대한 가톨릭계의 활동도 더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가 교구장으로 있는 서울대교구는 지난해 10월 우리 사회에 자살, 낙태 등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해 있다고 보고 생명 존엄성에 대한 인식 확산을 위해 생명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생명위원회는 100억원 규모의 기금을 마련, 윤리적 논란이 있는 배아줄기세포 대신 성체줄기세포 연구를 지원키로 해 세간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정 추기경은 평소 가정의 소중함도 역설해왔다. 그는 자주 “올바른 가정 교육은 평생을 지켜주는 울타리”, “이혼은 물론 자녀 앞에서는 부부싸움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정 추기경의 이런 모습은, 김수환 추기경이 1970, 80년대 인권을 강조하며 민주화 운동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과 비교돼 종종 그를 보수적 인물로 비쳐지게 했다. 그러나 가톨릭의 한 관계자는 “70, 80년대는 정치적 격동기였던 반면, 지금은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행됐기 때문에 생명, 가정, 환경 문제 등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더 많다”며 “정 추기경은 그 같은 요구에 잘 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사회주의권 선교에 관심이 많은데다, 정 추기경이 평양교구장을 겸직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향후 대북 선교 활동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지만 이를 조심스럽게 보는 시각도 있다. 정 추기경이 대북 선교에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의 북한 사회를 그리 호의적으로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북 선교가 단기간에 큰 성과를 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 정 추기경 일문일답 "교황- 국가지도자간 중개역할도 소임의 일부"
정진석(75) 추기경은 23일 오전 가톨릭 교계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 “사랑을 나누고, 서로 도와가는 삶을 살 때 사회의 부조리, 불합리, 타인의 인격에 손상을 입히는 일은 줄어들 것이며, 서로 도와가며 상대를 위해 사는 삶을 사는 게 행복한 삶”이라고 말했다.
정 추기경은 “대다수는 자신이 가진 것이 많지 않음을 알기에 남과 나눠갖는 것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데, 물질만 생각하면 그럴 수 있지만 사랑은 나눌수록 커진다”며 이같이 밝혔다.
-추기경에 서임된 소감은.
“교황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말하는 것들을 세계 지도자들이 경청하고 그 뜻을 존중하기를 기도하고, 협조하는 임무가 소임 중 하나다. 교황이 생명 존중과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데, 그런 뜻이 실천 가능하도록 교황과 국가 지도자들 사이에서 중계 역할을 담당하는 것도 소임 중 하나라고 본다.”
―한국의 두 번째 추기경 탄생으로 위상이 높아진 서울대교구의 향후 활동 방향은.
“추기경 추가 임명은 한국 교회가 아시아 선교를 위해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라 생각된다. 올해 서울대교구 대신학교(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가 베트남, 방글라데시, 중국의 신학생들을 받아들여 양성을 시작한다. 아시아 지역 교회에서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힘든 나라의 신학생을 양성하는 일을 할 것이다. 이들 아시아 성직자들이 같은 신학교 출신이라는 게 기초가 돼 국가간 우호적 관계를 증진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역할과 책임도 무거워질 것 같은데.
“우리나라와 교회를 위해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으려면 여러분이 지금껏 해온 노력에 내 작은 힘을 보태야 한다고 믿는다. 지도자로서 혼자 이끌어 갈 능력은 없기에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의 좋은 뜻을 한곳으로 모으면 좋은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함께 기도해 주기 바란다.”
-사목 표어로 ‘옴니버스 옴니아’(Omnibus Omniaㆍ모든 이에게 모든 것)를 정하게 된 연유는.
“사회가 이상적으로 복되게 발전하려면 각자가 자기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 많은 사람들에게 선익이 되는 삶을 살면 사회 전체가 복된 공동체가 된다고 믿기에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겠다는 다짐으로 1970년 주교 수품을 받을 때 정했다.”
―추기경에 대한 주변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한순간 한순간 성실하게, 낭비 없이 살려고 노력했다. 노력은 많이 했지만 칭찬 들을만한 삶을 살기엔 부족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공부한 것을 혼자 갖고 있기 미안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책을 쓰기 시작한 게 여러 권의 책을 내게 됐다. 이제 번역하고 책을 쓰는게 생활의 한 부분, 취미처럼 됐다.”
박광희기자
■ 바티칸-中 관계 회복될까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중국 본토 출신의 조지프 쩐(陳日君ㆍ74ㆍ사진) 홍콩 주교를 추기경에 임명, 로마 교황청과 중국 정부의 관계 복원에 힘이 실리고 있다.
쩐 신임 추기경은 중국 당국의 시각에서는 반체제 인물이다. 중국 당국의 교회 및 인권 탄압을 노골적으로 비판해왔으며, 1989~96년 본토의 지하교회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추방당해 2004년에야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본토를 방문할 수 있었다.
때문에 지난해 4월 즉위한 교황이 앞으로 가톨릭 교회를 이끌고 갈 방향을 가늠하는 잣대로 이번 추기경 임명에 촉각을 세워온 교회 안팎에서는 쩐 추기경에 실린 정치적 의중에 주목하고 있다. 쩐 추기경도 자신의 임명에 대해 “교황이 중국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BBC 방송은 “교황이 종교의 자유를 중요시하며 중국의 교회 탄압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평양 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는 정진석 대주교의 임명도 자유와 진리를 위한 공산권의 가톨릭 선교에 대한 의지 표명으로 읽혀지고 있다.
외신들은 쩐 주교의 추기경 임명은 바티칸이 중국과 외교 관계 회복을 위한 첫 단계라고 분석했다. 교황은 바티칸과 중국의 관계 정상화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밝혀왔다. 중국은 51년 바티칸과 수교를 단절했고, 정부가 승인한 ‘가톨릭애국회’를 통한 교회 활동만 인정하고 있다. 내정 간섭을 이유로 교황청의 중국 본토 내 주교 임명에 반대하는 등 바티칸과 갈등을 빚어왔다. 중국에는 정부가 공식 인정한 400만 가톨릭 신자 이외에 바티칸을 따르는 지하교회 신자도 1,0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바티칸 일각에서는 쩐 추기경이 지하교회를 지지하고 홍콩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투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중국 정부와의 관계 복원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본토 가톨릭 교회 사정에 정통한 전문가로는 유일하다는 점 때문에 쩐 추기경은 바티칸이 중국과의 관계 회복을 추진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중국도 교황청의 결정에 강하게 반발하지는 않으리란 전망이다. 대만의 레이먼드 타이 전 교황청 대사는 바티칸과 중국 당국의 사전 조율 가능성을 지적했다.
상하이에서 태어난 쩐 추기경은 공산당 지배를 피해 홍콩으로 건너와 로마에서 유학한 뒤 61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2002년 선종한 존 후(胡振中) 추기경로부터 홍콩 교구를 물려받았다.
문향란 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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