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두루마기에 하얀 수염. 하산한 산신령 같은 모습으로 사회 불의를 지적하는 자리에 늘 함께 했던 함석헌(1901~1989) 선생. 평화사상가, 종교인, 언론인, 민족ㆍ민권 운동가 등으로 족적을 남긴 그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탄신 105주년을 앞두고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씨알사상연구회와 함석헌기념사업회는 3월11일 ‘씨앗 함석헌의 철학’을 주제로 탄신 105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는 이기상 외국어대 철학과 교수, 이규성 이화여대 철학과 교수가 각각 주제 발표를 할 예정이다.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에 맞춰 ‘내가 본 함석헌’(가제ㆍ아카넷 발행)이라는 단행본을 내고 같은 날 출판기념회를 연다.
이에 앞서 한국민중신학회는 지난 13일 ‘함석헌 민중 사상의 민중신학적 의미’를 주제로 총회를 겸한 학술대회를 개최했으며, 지난해 11월에는 함 선생이 졸업한 오산학교가 그의 생명사상을 주제로 설립 100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었다. 비슷한 시기에 함석헌 연구가 이치석 선생이 ‘씨알 함석헌 평전’을 냈고, 1986년에 나왔던 ‘함석헌 인생론’은 최근 ‘함석헌 자전적 인생론’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판됐다.
생전의 함 선생은 두 가지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한쪽은 그를 민주주의 인권운동가로 높이 평가한 반면, 기성 교단과 권력자는 종교적 이단자, 순진한 이상주의자 혹은 선동가 등으로 매도했다.
최근의 재평가 작업은 이 가운데 전자의 측면을 부각시키자는 것이다. 이는 그의 철학이 동서양 사상의 융합을 꾀하고, 사회변혁을 추구하면서도 포용력을 갖췄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철학계, 신학계 등을 중심으로 새롭게 조명받고 있기 때문이다.
박재순 씨알사상연구회 회장은 함 선생을, 주체적으로 동서양 사상의 결합을 꾀한 거의 유일한 한국 사상가로 평가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 철학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관변 사상으로 변질됐고 해방 후에는 서구 사상이 지배했는데 이때 함 선생은 동서양 사상의 결합을 적극 추진했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함 선생은 풀뿌리 민주주의를 역설하면서도 비폭력 평화주의를 내세웠고, 기독교로 대표되는 서구 사상을 흡수하면서도 공자와 노장사상에 심취했다”며 “이 때문에 그의 사상에는, 기독교적으로 보면 원수마저 사랑할 정도의 포용력을 갖추고 피아의 대립을 초월하는 화합을 강조했다”고 평가했다.
사제도, 목사도, 설교도 없이 각자의 내면에 있는 영성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는 퀘이커 교도였던 그는 기독교 근본주의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천인합일(天人合一) 사상을 펴기도 했다.
권진관 성공회대 신학과 교수는 “민주화의 진행으로 요즘은 사회 변혁만 강조하면 거부감을 줄 수 있다”며 “함석헌 사상은 사회 변화와 내면의 성찰이라는, 양립하기 어려운 두 가지를 모두 갖췄다”고 평가했다. 그는 “최근에는 그의 사상과 철학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아쉬워하면서 “내면의 사상이 사회 변혁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과정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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