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한다. 비슷한 표현으로 나는 ‘소주 맛’을 알지 못하는 이들과는 말 통하기가 어렵다고 농담 한다.
눈물이 뚝뚝 흘러 손에 들린 빵을 적시는데, 그래도 배가 고파서 그 빵을 먹어야 하는 그런 시추에이션을 겪어본 사람들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다.
엄마는 육개장만 보면 당신 친정 엄마를 보내던 날이 떠오른다고 한다. 살아생전 남에게 ‘보시’하는 것만 잘하셨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많은 이들이 장지까지 쫓아와서 그렇게 울었다는데. 그런데, 장례식이 끝나고 겨울 산을 내려와 뜨끈한 육개장을 차려냈더니 그토록 울던 사람들이 너무나 맛있게 먹더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몇 날을 너무 울어서 수저를 들 힘조차 없을 줄 알았는데, 뱃속으로 훈훈한 육개장 국물을 한 술 흘려 넣었더니 계속해서 떠먹게 되고, 이어 밥도 한 술 입에 넣고 하면서 자연스레 식사를 하게 되더란다. 가슴으로는 울고 있는데, 살아야 하니까 배가 고프니까 입으로는 뭔 일 있었냐는 듯이 밥을 먹게 되더라는 얘기.
▲ 마카로니 치즈
탈옥수들이 벌이는 에피소드를 유쾌하게 그려낸 영화 ‘광복절 특사’를 보면, 갓 탈옥한 남자 주인공으로 분한 배우 차승원이 시장 통에서 빵을 훔치다 들키는, 그러나 몰매를 맞으면서도 빵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창피하고 서럽고 걱정은 가득해서 눈물이 주륵주륵 흐르는데, 너무 배가 고픈 탈옥수는 눈물에 젖은 빵을 울면서도 입 안에 쑤셔 넣는다.
지인 중에 어떤 이는 부모님의 사정으로 할머니 슬하에 자랐는데, 항상 생활비가 넉넉지 못하셨던 할머니는 일 년 열두 달 우거지 반찬만 해주셨다 한다. 우거지 국, 우거지 무침 등의 반찬이 다섯 살의 꼬마 입에는 얼마나 재미없었을 것인가. 그 친구는 삼십대가 된 지금도 우거지를 보면 먹지 못한다. 그에게는 우거지가 ‘눈물 젖은 빵’인 것이다.
맞벌이 부모나 별거중인 부모의 비율이 이미 십 수 년 전부터 높아왔던 미국. 미국에서 아이들이 가장 요리하기 쉬운 음식은 아마 마카로니일 것이다. 마카로니는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건면의 일종으로 손톱만한 튜브 모양인데, 알맞게 익히면 쫄깃한 식감을 준다.
마카로니를 큰 봉지로 하나 사 두면 상할 염려도 없고 그야말로 두고 먹기 편리한데, 게다가 끓는 물에 익히기만 하면 케첩에 비벼먹든, 샐러드에 넣어 먹든 손쉽게 끼니로 탈바꿈 하니 바쁜 부모를 둔 아이들의 구세주다. 미국에서 아이들이 가스 불을 켤 줄 아는 나이가 되면 배우는 요리가 대게는 이 ‘마카로니 치즈’라는 메뉴일 것이다.
물에 익힌 마카로니를 전자레인지용 접시에 담고 노란 체다 치즈를 듬뿍 올려 열을 가해서 녹인 다음 비벼먹는 것이다. 참으로 단출하고 쓸쓸한 음식이다. 어린 시절 손수 마카로니 치즈를 만들어 먹어야 했던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마카로니 치즈는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되는 일이 많다.
어차피 미국 사회에서 마카로니는 저 소득층의 간편식 정도로 인식이 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찾아 먹는 메뉴는 아니지만, 어쨌든 귀가 후 TV를 틀어놓고 숙제나 하다가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집에 못 오는 부모를 대신하여 직접 요리한 마카로니로 배를 채웠던 날들이 길면 길수록 마카로니에 질색한다.
▲ 계란 샐러드 빵
가격대비 영양분을 비교하다 보면 ‘계란’만큼 저렴하고 영양가 많은 식품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삶은 계란이라도 한 두 알 까먹다보면 배도 든든해지고 영양까지 챙길 수 있으니 계란은 그야말로 빈자들의 영양제나 다름없다.
계란을 보면 특히 10년 전 나의 자취시절이 떠오르는데, 자취 생활이 가장 힘들 때는 바로 아플 때와 혼자 지내는 생일이었다. 한번은 감기 때문에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몇 날을 앓았었는데 마침 생활비도 똑 떨어진 상태여서 이렇다 할 영양보충도 못하고 있었다. 친구 하나가 계란 한판을 들고 나를 찾아 주었는데, 일본인인 그녀는 계란 몇 알을 삶더니 ‘사라다 빵’을 만들어 주겠노라 했다. 삶은 달걀을 곱게 썰어서 다진 야채와 섞고 새콤달콤한 피클 물이랑 마요네즈를 섞어서 속을 만들고 반으로 가른 빵 사이에 듬뿍 채워서 내게 내밀었다.
마요네즈 냄새를 맡으니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 줬던 샌드위치 생각이 나서 갑자기 나는 울음보가 터졌는데, 따져 보니 내 병의 근원은 감기가 아니라 향수(鄕愁)였던 것이었다. 그 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남김없이 먹어 치웠던 계란빵의 맛을 나는 잊지 못한다.
너무 외로웠고 근심 가득했던 시절의 내 모습, 결핍이 많았던 학창시절의 내 모습이 고소하게 버무려진 마요네즈 계란의 맛과 함께 아직도 생생하다.
‘눈물 젖은 빵’에 대해 쓰겠노라 했더니 본 원고를 받는 신문사의 기자는 당신의 어린 시절에 부모님들이 맞벌이로 바빴기에 혼자 라면을 끓이기 시작한 노하우가 1,000가지 비법에 이를 정도였다 하며 웃었다.
‘눈물 젖은 빵’에 대해 쓰겠노라 했더니 누구는 ‘수제비’를, 누구는 ‘물에 만 밥’을 이야기 해주며 눈시울을 붉혔다. 누구에게나 ‘눈물 젖은 빵’이 하나씩은 있는가 보다. 그리고 눈물에 젖은 빵이라도 꾹 참고 먹다 보면 삶은 또 계속되는가 보다. 푸드채널 ‘레드쿡 다이어리’ 진행자
미국 아이들이 손쉽게 만들어 먹는 마카로니 치즈와 필자의 유학시절 향수병을 달래주었던 계란 샐러드 빵. 누구에게나 눈물 젖은 빵은 하나씩 있는가 보다.
사진 임우석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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