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이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이란 평가를 받았던 ‘피플파워’에 의한 민주화를 실현한 지 20년이 됐지만 여전한 정치 불안과 경제 악화로 8,400만 국민들이 신음하고 있다.
25일은 독재자 페르디난도 마르코스를 몰아낸 지 20주년이 되는 날이지만 그를 몰아내면서 온 국민이 기대했던 ‘장밋빛 전망’은 온데 간데 없다.
개혁 실패에다 남편이 불법도박조직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의혹이 겹친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만 한 달째 계속되고 있다.
20일 대통령 궁에서 암살 기도로 추정되는 폭발이 일어난 데 이어 22일에는 쿠데타 음모가 적발돼 주동자들이 체포됐다. 24일 마닐라에선 대규모 반 아로요 집회까지 예정돼 있어 필리핀의 정국 불안은 더 깊어질 전망이다.
국민들의 분노는 무엇보다 경제 등 각종 정부 정책의 실패에 있다. 한때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각광을 받았던 필리핀 경제는 마르코스 집권 말기 부도 상태에 빠진 뒤 현재도 주변 개발도상국 가운데 가장 낮은 성장률을 보이고 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따르면 필리핀은 1970~2003년 연평균 3.6%의 성장에 그쳤다. 1971년만해도 1인당 국민소득이 206달러로 태국, 인도네시아, 중국을 앞섰으나 현재는 태국의 3분의 1 수준이고 경제규모도 태국의 절반이다. 10년 안에 베트남에도 추월 당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정부의 세입 중 47%를 이자를 갚는데 쓸 정도로 엄청난 국가부채에도 시달리고 있다. 재정난이 심각하다 보니 교육에 대한 투자는 1999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3.4%에서 지난해는 2.4%로 떨어졌고 보건 분야 지출은 0.5%에서 0.19%로 저하됐다.
인프라 투자도 1.8%에서 0.73%로 절반 이하로 줄었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지난해 필리핀을 아프가니스탄과 볼리비아, 에콰도르, 네팔, 우간다와 비슷한 117위로 기록해 가장 부패한 국가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구관이 명관’이란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지고 있다. 지난해 7월 여론조사에선 마르코스가 10점 만점에 7점을 받아 전ㆍ현직 대통령 가운데 가장 높은 평점을 받았다.
아로요 현 대통령은 4점을 얻는데 그쳤다. 지난달 펄스 아시아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필리핀 국민의 36%만이 ‘마르코스를 축출한 피플 파워를 지지한다’고 답했을 정도다.
황양준 기자 naig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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