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역사상 가장 막강한 부통령으로 통하는 딕 체니 부통령이 언론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고 있다. 메추라기 사냥 도중 오발사고를 내 사냥 동료를 다치게 한 사건 자체가 우선 흔치 않은 일이어서 관심을 끌만하다.
미국의 부통령이 누군가를 쏜 것은 200여 년전인 1804년 7월 당시 아론 버르 부통령이 ‘결투’에서 상대방을 쏘아 결국 죽게 한 이후 처음이라는 얘기까지 등장했다.
시청자의 눈과 귀를 현혹해야 하는 미 방송들은 앞 다퉈 체니 부통령을 조롱거리로 삼고 있다. 사건 자체는 실수에 의한 사고일 뿐인데 그것을 시청률 끌어 올리기에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러나 사고 수습과정에서 보여준 체니 부통령의 오판, 또는 오만은 이러한 ‘정상참작’의 여지를 일거에 없애 버렸다. 미 국민들이 이 소식을 접한 것은 오발사고를 일으킨 지 18시간이 지난 일요일 오후였다. 그것도 사냥 장소였던 남부 텍사스 농장의 주인이 지역 언론에 알리고 나서야 겨우 소식이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체니 부통령측은 공식적인 성명서나 사고 경위서 한 장 내놓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사건 자체의 은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TV 시청률이 높은 일요일을 피해 이 일이 알려지기를 기도했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지만 체니 부통령의 이 같은 기대는 보기 좋게 무너졌다. 미 언론들은 상업주의를 적당히 섞어 가면서도 미국의 2인자가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려 했다는 점에 대해선 시퍼렇게 날선 잣대를 들이댔다. 체니 부통령은 사냥꾼으로서도 낭패를 봤지만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국가 안보와 직결될 수 있는 최고 공직자로서도 실패했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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