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의 여러 문제들을 공동 연구하고, 그 성과를 일반에 보급함으로써 사회 민주화와 통일에 기여한다’. 군사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86년 2월 2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뒷편 종로구 내수동의 건물 한 칸을 빌려 설립된 역사문제연구소가 올해로 출범 20년을 맞았다.
연구소는 그때까지 불모지였던 한국 근현대사 연구를 자임하면서, 단지 연구에만 머물지 않고 진보적인 학술연구 성과를 구축하고 그것을 통해 사회개혁에 이바지한다는 학문적 실천까지 감당해왔다. 성년이 된 연구소의 지난 세월은 그래서 국내 어떤 학술단체가 걸어온 길보다 의미가 각별하다.
초대 이사장 박원순 변호사를 비롯해 원경 스님, 소설가 김성동씨,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등의 발의로 꾸려진 연구소에는 연구자들은 물론, 한때 ‘양산박’(수호지의 무대)이라고 불릴 정도로 재야 인사들의 출입이 잦았다. 창립 당시 운영위원으로 참여했고 2000년부터 소장을 맡고 있는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연구소의 가장 큰 특징은 비역사학도까지도 광범위하게 간여한 재야적 성격이며, 역사연구에 정치학, 사회학, 문학을 고루 결합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활동의 주축은 공동연구, 월례발표회, 학술토론회, 심포지엄 등 30여명의 연구원을 중심으로 한 연구와 출판. 서 소장은 “북한문제나 민족주의 논쟁 등 근현대사를 쟁점과 사건 중심으로 다양하게 연구ㆍ토론했고, 그 결과물을 대중적인 것은 ‘역사비평’을 통해, 좀 더 학술적인 것은 ‘역사문제연구’를 통해 정리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87년 창간한 계간 ‘역사비평’은 역사를 다루면서도 시사성까지 겸비해 국내 학계에 ‘대중 역사학술서’라는 새 영역을 연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넉넉치 않은 형편에 통권 73호까지 내면서 단 한 번의 결호도 없었다.
일찌감치 ‘한국사교실’과 ‘역사기행’을 두 축으로 우리 민중이 겪은 질곡의 역사, 분단의 아픔 등을 강연과 현장 답사로 대중에게 생생히 보여주고 들려준 것도 업적이다. 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중국, 일본 등 해외 학술단체들과의 교류도 강화하고 있고, 전문학술서는 물론 ‘인물로 보는 친일파의 역사’ ‘한국 현대사의 라이벌’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 등 대중 역사서도 꾸준히 냈다.
80년대에는 금기나 다름 없던 북한연구 등을 주제로 잡다 보니 공권력의 감시를 피할 수가 없었다. 서 소장은 “87년 북한현대사 토론중 연구자들이 경찰에 불려간 적도 있고, ‘역사비평’ 등에 실린 북한 관련 글을 적당한 수위에 맞춰 교정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내년 2월 연세대 방기중 교수가 소장직을 맡게 되면 젊은 학자들이 더 활발히 활동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연구소는 18일 오후 5시30분 한국일보사 13층 송현클럽에서 창립 20주년 기념식을 열며, 9월에는 ‘식민지 근대, 분단 근대를 살다’를 주제로 기념 심포지엄도 개최할 계획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 서중석 소장 "20세기 한국史 20권 全集으로"
역사문제연구소가 개항기 이후 역사를 망라하는, 작업의 질이나 규모 면에서 유례가 없는 대형 한국 근현대사 전집을 기획해 올해 말 선을 보인다. 모두 20권인 ‘20세기 한국사 시리즈’(가칭)는 최신 연구성과를 대중들이 읽기 쉽게 녹여내는 것을 기본 방향으로 잡아 논란이 많은 근현대사 인식에 도움이 될 의미있는 책으로 기대된다.
전체 시리즈는 ‘개항기’ ‘일제시기’ ‘해방후’ ‘주제별 통사’ 등 네 주제로 나뉜다. ‘해방 후’ 가운데 ‘제1공화국과 4ㆍ19’(저자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 ‘박정희 시대’(조희연 성공회대 교수) ‘5ㆍ18과 6월 항쟁’(정해구 성공회대 교수) 3권이 먼저 나온다.
서중석(사진) 교수는 집필 방향에 대해 “남한이 유엔 감시하에 단독으로 치른 5ㆍ10 선거는 민주주의 절차에 따른 우리나라 최초의 선거라는 의미를 무시해선 안된다”며 “다만 그 선거로 남북분단이 합법화 했다는 점, 과연 통일의 길이 없었겠느냐는 김구, 김규식 선생 등의 고민은 또 그것대로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승만이 선거부정을 저질렀고 독재를 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된다”면서도 “1950년대는 굉장히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고 경제발전의 발판을 만든 시기라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서 교수는 “근현대사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큰 것처럼 보이지만 학문적 논쟁을 벌인다면 접점은 더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시리즈는 특히 권마다 ‘보론’ 형식으로 해당 시기에 대한 다양한 역사해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계획이어서 주목된다. 시리즈는 ‘민족과 계급’ ‘자본가와 민주주의’ ‘토지와 농민’ ‘반공과 근대화’ 등으로 구성된 ‘주제별 통사’를 끝으로 2009년 말에 마무리될 예정이다.
김범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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