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을 ‘클래식 연주회의 오랜 관행은 공연 팸플릿에 학력을 기재하는 것’이라는 말로 시작한다면 누구라도 이 글의 내용이나 목적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관행이 왜 필요했는가를 먼저 집고 넘어가려고 한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평가를 내려야 할 때가 많다.
회사에서 갓 졸업한 신입사원을 뽑거나, 학교에서 신입생을 뽑을 때 가장 많이 학력 위주의 프로필을 요구하게 된다. 이것은 분명 악습은 아니다. 심사위원의 입장이 되어보면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누가 어떤 재능을 가졌는가를 일일이 판단하기란 쉽지 않을 뿐더러,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활동 경력을 요구한다면 거꾸로 그들 자신도 난감할 것이다. 문제가 생긴다면 같은 학교 출신에게 이익을 준다든가 사회가 정해놓은 소위 ‘학교 수준’의 기준으로 하는 차별 등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예술분야에서 이런 관행은 과연 얼마나 정당한 것일까?
연주회나 공연을 감상하러 가는 것은 오케스트라나 학교에서 사람을 뽑는 일과는 분명히 다르다. 콘서트를 여는 주체는 프로의 세계에 이미 발을 디딘 사람들이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느 나라에서 공부했고 누구를 사사했는지는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그럼, 도대체 우리가 잘 모르는 연주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보를 토대로 공연을 접해야 할까라고 질문할 지도 모른다. 무조건 그의 실력을 가서 확인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자크 펄만이나 장영주같은 대스타들은 그런 정보없이도 신용이 가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니까. 관객, 평론가 심지어는 연주자 자신까지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이냐!”
그들은 그 이상의 경력이 필요하다. 학력은 언제나 경력의 아래에 있다. 나 역시 학력을 프로필로 내세우지 않는 콰르텟엑스의 연주자로서 언제나 이런 논쟁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오랫동안 신중하게 생각해 왔고 많은 일들을 겪었다. 최근 우리 팀의 매니저가 다른 사람들과 이런 논쟁을 한 적이 있다. 누군가가 “연주자들이 공연마다 이슈를 불러 일으킬 수는 있겠지만 정작 그들의 실력은 어떨까요?
공연을 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는데, 그는 한마디로 일축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물론, 화제의 당사자인 나 자신도 깊이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가 산악인을 평가할 때, 혹시 그가 어느 등산학교를 나왔는지, 어느 산악인으로부터 배웠는지를 물어보겠습니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산들을 정복했는지 일 것입니다.”그렇다. 이것이 프로세계의 평가 기준이다. 예술가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활동 초창기에 커다란 공연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남보다 나은 학력의 도움이 필요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도움을 받아 일단 프로젝트에 성공하게 되면 이전의 학력은 무의미해지고 그 성과가 곧 그들의 경력인 것이다. 연주회 팸플릿은 그러한 업적들로 가득 매워야 한다. 경력을 쌓기 위해 처음에 필요했던 사다리를 잊어서는 안되지만 사용 후에는 버려야 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사다리’일지도 모른다.
현악사중주단 콰르텟엑스 리더 조윤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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