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시작해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베니스영화제는 독재자 무솔리니의 작품이다. 무솔리니는 자신의 치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당시 대중매체의 총아인 영화를 이용했다. 대중 선동술에 능통했던 나치의 괴벨스도 체제 선전을 위한 도구로 영화를 악용했다. 미국 할리우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공황의 여파에 휘청거리던 할리우드는 2차 세계대전 내내 선전영화의 생산기지 역할을 자임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억압 받는 자들에게도 영화는 무기였다. 1960년대 볼리비아의 영화집단 ‘우카마우’는 “영화는 1초 동안 24프레임의 총알을 발사하는 혁명의 기관총”이라고 선언하며 독재정권의 인디오 착취 정책에 맞섰다.
지난 19일 막을 내린 베를린영화제는 정치 영화의 한마당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보스니아의 비극을 다룬 ‘그르바비차’가 최고 영예인 황금곰상을 수상했고, 미군의 이라크 포로 인권유린 실상을 파헤친 ‘관타나모 가는 길’이 감독상을 받았다. 베를린영화제가 전통적으로 정치색 짙은 영화를 선호해왔다지만, 올해의 결과는 이례적이다.
할리우드도 시대를 비판하며 현실의 고통을 껴안으려는 영화가 붐을 이루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뮌헨’을 필두로 걸프전쟁의 참화를 그린 ‘자헤드:그들만의 전쟁’, 석유 이권을 둘러싼 정치적 음모와 배신을 다룬 ‘시리아나’, 세계경찰국가 미국의 위선을 고발한 ‘아메리칸 드림즈’, 이라크전의 추악한 이면을 드러낼 ‘노 트루 글로리:배틀 포 팔루자’ 등이 잇달아 만들어지고 있다.
영화는 정치와 시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요즘 충무로는 현실로부터 비켜서있다. ‘그 때 그 사람들’과 ‘홀리데이’가 개봉됐고, ‘노근리 전쟁’이 제작 중이지만 현재진행형의 사회문제를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은 탈북자의 아픈 사랑을 담아낸 ‘국경의 남쪽’ 정도에 불과하다.
2000년대 초반까지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노동과 통일문제 등 사회의 어둠을 이야기하려 했던 한국영화와는 너무나 다르다. 시대의 아픔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것은 1,000만 관객 시대를 맞은 한국영화의 감춰진 슬픈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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