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2월5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34차 한미안보협의회(SCM)에서 이준 국방부 장관과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부 장관은 중요한 문서 하나를 교환했다.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와 9ㆍ11사태로 변모하고 있는 미국의 세계전략을 반영, 통일 이후까지의 한미동맹 개념을 재정립하기 위한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에 관한 약정서(TOR)’다. 이는 이듬해 2월 한미동맹의 터닝포인트가 되는 제1차 ‘미래 한미동맹 정책구상(FOTA)’ 회의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약정서가 한미 국방당국 실무자가 2년 여의 협의 끝에 마련한 ‘한미동맹 미래 공동협의 결과’ 보고서(15일자 1면)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로부터 3년 여가 지난 15일 한미 양국은 괌에서 6차 안보정책구상(SPI)을 열고 미래 한미동맹의 청사진을 논의했다. 협상 테이블에는 ▦한반도 안보상황 평가 ▦한미연합지휘체계 변화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등의 의제가 올라가 있다.
이 가운데 핵심이 되는 한반도 안보상황 평가에 대해서는 남북관계를 화해협력→평화공존→통일의 3단계로 놓고 단계별로동맹의 목표와 가상의 우려사항 등을 협의했다. 이 구분법과 단계별 가정 및 우려사항은 3년 전 한미동맹 조정협상의 출발점이 됐던 ‘공동협의 결과’ 보고서와 거의 같다.
SPI가 FOTA의 바통을 이어받은 한미동맹 조정 협의체라는 점을 감안할 때 FOTA에 단초를 제공했던 ‘공동협의 결과’ 보고서는 동맹의 청사진을 마련하는 단계에까지 영향을 미친 셈이다.
참여정부 3년 동안 한미 양국은 FOTA를 통해 용산기지 이전 협상을 마무리하고 전략적 유연성 협상과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 참가 협의를 일단락하는 등 실질적으로 동맹 조정을 진척시켰다.
협상은 2003년부터 본격화했고 2004년 주한미군의 이라크 차출에 따른 주한미군 감축, 전략적 유연성 개념 도입 등으로 동맹 조정의 폭이 확대됐다. 이 때문에 국민의 정부 시절 만들어진 ‘공동협의 결과’ 보고서가 한미동맹 조정과 관련 없다는 주장이 있다. 국방부는 “보고서는 2002년 이전 개념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최근 안보현안 논의과정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동맹 조정의 시작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최고조에 이른 남북평화무드와 2001년 9ㆍ11사태로 초국가적 테러전쟁에 직면한 미국의 세계전력 변화에 있다는 데 이의를 다는 전문가들은 없다. ‘공동협의결과’ 보고서는 다름아닌 국민의 정부 말기 한미 양국에서 동시에 진행되던 안보환경의 변화를 담고 있다.
익명의 정부 당국자는 “전략적유연성 개념이 확립된 것은 2003년 이후지만 그 시작은 9ㆍ11테러인 만큼 2002년 작성된 보고서를 전략적 유연성 협상의 뿌리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정곤기자 jk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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