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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 칼럼] 8,000억원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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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화숙 칼럼] 8,000억원이 있다면

입력
2006.02.27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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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는 2002년 방한 때 방송 인터뷰에서 북한을 무조건 도우라면서 “도움이 없으면 그들이 고향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혹시 작가가 한 말이니 문화적인 뿌리가 끊긴다는 걱정으로만 받아들일까봐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렇다. 사람이 고향을 떠나는 것은 더 이상 고향에서는 먹고 살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은 타향에서 살 집과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가까운 이웃이 있던 고향에서도 쉽지 않던 취직과 정착이 타향에서 쉬울 리 만무하다. 이들을 받아들인 곳 역시 집과 일자리는 제한되어 있으니 본토박이들과 경쟁이 벌어질 수 밖에 없다.

결국 떠난 사람도 받아들인 사람도 불행한 사회가 오지 않게 하려면 제 땅에서 잘 살 수 있는 방안을 찾아주는 수 밖에 없다. 귄터 그라스의 말은 남북관계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사는 어느 땅에나 다 통용되는 진리이다.

●빈부격차, 이농현상과 밀접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빈부격차 문제도 궁극적으로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이농현상과 관련이 깊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온 이들 가운데 자수성가했거나 자식의 교육에 성공한 세대는 시차를 두고 가난을 탈출했지만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가구는 도시 주변을 떠돌며 빈민층을 형성하고 빈곤을 대물림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방인구는 계속 도시로만 몰려들고 있으니 도시에서는 주택문제 실업문제, 사회문제가 심각하고 지방에서는 인구가 줄어 걱정이다. 도시인구가 늘어나면서 올라가는 집값은 빈곤층을 계속 가난하게 묶어둔다.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주택공급을 늘리고 임대주택을 많이 짓고 신도시를 개발한다고 하지만 갈증에 설탕물 마시기이다. 어디를 개발하든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을 내몰기는 마찬가지이고 도시 중심의 정책에 따라 인구는 더욱더 도시로 몰려든다. 현재의 인구감소추세를 생각하면 그렇게 많이 짓는 아파트들이 텅 비어 슬럼가를 형성할 미래도 걱정스럽다.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등 서유럽의 문화관광경영학 교수들은 1990년대초 사회주의권 붕괴로 동유럽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유럽지역예술발전연대(LEAD: Linked Euroregion Arts Development Network)’라는 기구를 만들었다. 이들은 동유럽의 전통공예와 환경, 문화 자체를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도록 서유럽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사람이 떠나기보다는 사람을 끌어들여 잘사는 이 방안이 동구에서 효과를 보았는지 지금은 아시아 지역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 몬태나주립대 건축학과 교수인 조병수씨는 2002년 미국 제자들을 한국에 데려와 실습을 했다. 그때 제자들까지 반해 새벽까지 쏘다닌 곳이 포항 장기곶의 작은 어촌마을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전통가옥들이 구불구불 이어진 모습이 무척 매혹적이어서 전통가옥을 그대로 살리며 리모델링하면 유럽의 휴양도시 부럽지 않은 관광자원이 되겠다고 했다.

들어가는 돈이라야 집마다 3,000만~4,000만원, 마을 전체로도 불과 몇 십억원만 있으면 가능하다고 했다. 이곳 앞바다에는 몇 년전부터 고래가 몰려든다. 고래 구경은 외국에서도 생태관광으로 인기가 아주 높다.

●시골 마을 되살리기 프로젝트를

그러니까 8,000억원을 쓴다면 시골 마을을 되살리는 프로젝트에 나서라고 삼성에 권하고 싶다. 마을은 그대로 살리고 건축가의 자문을 받아 전통가옥의 내부만을 도시 중산층 주택 수준으로 쾌적하게 고쳐주어서 시골 사람들이 제 땅에서 그 환경을 관광상품으로 삼아 먹고 살 수 있도록 말이다. 마을 안에는 공예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 지역의 산물로 남들이 흉내 못 내는 관광상품이 나온다. 그래서 결국에는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 행복해서 벌이는 축제가 사람을 불러모으게 될 것이다.

건축가와 디자이너와 교육자가 합심해야 하는 일에 정부보다 기업이 유능할 것이다. 그러니 삼성은 돈 8,000억원을 쾌척하는 데 그치지 말고 효율적인 경영기법을 마을 살리기, 고향 살리기, 가난한 사람에게 지속가능한 일자리 주기에 접목해주면 어떨까.

대기자 hssu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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