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는 신이 기도를 들어주는 것을 감사하지만, 나는 오히려 들어주지 않는 것을 감사할 때가 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었다면 나는 어쩌면 지금보다 불행해지거나 아예 세상 사람이 아닐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명예를 구해 누릴 수 있었으면 오만해졌을 것이고, 재물을 구해 갑부가 되었으면 십중팔구 타락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그런 나를 잘 알기에 작은 그릇에 큰 것을 담지 않으시고, 연약한 자에게 더욱 냉정해지지 않을 수 없었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끓임 없이 바라고 원하기에 가장 높은 곳에 계시는 분에게 호소해보지만, 바로 그러기 때문에 정작 그가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씀을 듣지 못한다. 비가 내리면 젖기는 해도 느끼지를 못한다.
기도를 일방통행으로 만들어놓고 애타게 자기를 향해 달려오기를 기다리니, 아무리 기다리고 달려 봐도 보이는 것은 땅과 하늘과 지평선이 있을 뿐, 어디에도 어떤 모습이나 그것의 그림자는 없다.
그는 분명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있건만, 우리는 그것이 지루해서 고속철 시골 역 지나치듯 혹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잡지 넘기듯 훌쩍 건너뛰고 만다. 그래서 항상 가까이하고자 하는 그로부터 더욱 멀어져만 가니, 신과 인간 사이 망망한 은하수는 기도의 오작교로도 건널 수 없게 되는 것인가?
“봄은 왔는데 왜 내 가슴은 춤추지 않는가?” 한낱 노랫말에 불과하건만, 밖은 살아있는데 안은 죽은 것이 분명하다. 아침의 자궁에서 이슬로 태어난 존재, 그것도 모자라 가슴의 엔진이 벌써 고장 나다니. 돌아보건대 봄이 와서 기쁜 사람이 있고 봄이 와서 오히려 서러운 사람이 있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소리, 봄아, 젊음은 어데 두고 너 혼자 오는가? 노발리스의 시에 “인간의 몸에 손을 얹으면 하늘에 닿을 수 있다” 했으니, 지나가는 이의 손이라도 낚아채야 할 것인가? 정말 알 수 없는 것은, 내가 지금 그의 품속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너무 외로워 외로움을 껴안고 있는 것인지?
겨울나무처럼 찬바람 속에 잎사귀를 다 떨구었으면 떨리는 마음으로 새잎파리가 나와야 되거늘. 눈 들어 하늘 보니, 보이는 것은? 나무에 걸친 사닥다리가 가리키는 곳은?
부디 한번만이라도 나의 삶에 사치와 호사를 허락하소서, 불필요한 것은 알아서 걸러낼 터이니. 그러나 이 기도 역시 들어주시지 않을 줄 믿사오니 감사드리나이다.
최병현 호남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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