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전 11시 옅은 녹색 점퍼를 걸친 할아버지들이 경복궁 경내를 향해 발길을 내딛었다. 흥례문, 근정전 등을 돌면서 경복궁 해설가로부터 궁궐의 유래와 각 건물의 사연 등을 전해 듣는 할아버지들의 표정은 진지하면서도 약간 흥분돼 있다. 문화재청이 70세 이상 고령자를 대상으로 선발한 궁ㆍ능 관람안내 지도위원 할아버지들이다. 선발은 서류 전형, 면접 등을 거쳐 이뤄졌는데 104명 지원에 10명이 합격, 10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이날은 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첫날. 24일까지 교육을 마친 뒤 25일에 1차로 5명이 창경궁 덕수궁 종묘 선정릉 서오릉에 1명씩 배치된다. 관람 안내, 유적 설명, 질서 유지 등이 할 일이다.
기업체 사장, 대학 학장, 언론사 상무, 경찰, 교사 등 만만치 않은 이력이지만 70을 넘겨 새 일을 시작하는 것이, 50여년 전 첫 직장 가질 때처럼 가슴 두근거린다고 이들은 말한다.
“관람객을 잘 안내하고 역사에 대한 안목을 좀 넓혀주려고 합니다. 봉사하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덕수궁에 배치되는 최고령자 성기찬(79) 할아버지는 각오가 의외로 단순했다. 서울대 법대를 나와 대학에서 법과 역사를 가르친 할아버지는 은퇴하기 전 순천제일대 학장을 지냈다. 평생 교육에 헌신한 만큼, 안내와 설명은 자신이 있다고 한다.
경기 고양시 서오릉에서 일할 권성기(74)씨는 부산 영도경찰서장을 지낸 전직 경찰관이다. 그의 감회는 좀 더 구체적이다. “경찰을 그만뒀지만 일을 더 하고 싶은 욕망은 버릴 수 없었어요. 이번 고령자 모집을, 능력만 있으면 나이 들어서도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사회적 변화로 받아들이고 싶어요.”
섬유업체 대표를 지낸 박세영(73)씨는 ‘역사학’ 집안이다. 부인이 역사 교사로 일했고 딸은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에 재직중이다. “집안이 이러니 역사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어요. 원서를 낸 그날, 딸이 궁궐에 대한 서적을 제게 건네면서 꼼꼼히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합격 통지를 받자, 친구들이 기뻐했습니다. 다들 일하고 싶은 마음은 비슷한데 기회가 없어서 못하거든요.”
김유해(72)씨는 중ㆍ고교에서 40여년간 역사 교사로 일한 전문가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자원봉사를 했고 역사 강좌와 문화유산 답사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선정릉에서 관람 안내를 할 그는 “역사 유적의 단순한 설명에 그칠 게 아니라 성종, 중종 등 능에 묻힌 임금의 업적과 당시의 역사적 사건 등을 알려주고 관람객에게 역사의식도 심어주고 싶다”고 구체적 계획을 밝혔다.
곽천(73)씨는 아직 정열이 넘쳐 보였다. 지난해 말까지 인천국제공항에서 자원봉사를 한 그는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합격 통보를 받자마자 인터넷을 뒤지고 책자를 뒤적이며 관련 정보를 모으고 있다고. “우리가 이 일을 잘 하고 관람객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으면 노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이 훨씬 좋아질 것”이라며 “그런 점에서 개척자라는 각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문사 사진 기자를 지낸 오덕선(77)씨, 육군 예비역 장교 고태잠(74)씨, 언론사 상무 출신의 최영일(73)씨, 공무원 출신의 최 각(72)씨, 대기업 출신의 남상준(71)씨 등은 7월 이후 배치된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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