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주들 사이에 보험상품을 악용해 회사 자금을 빼돌리는 신종 편법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회사가 거액의 보험료를 내도록 한 뒤 계약자와 보험금 수익자를 자신 명의로 이전하는 수법이다. 회사가 납입한 보험료와 보험금이 고스란히 기업주 차지가 되는 것이다. 특히 국내 굴지의 생명보험사들 까지 나서 이런 편법을 조장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중소기업 사장 A씨는 ‘합법적으로 회사 자금을 내 돈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보험설계사의 말을 듣고 최근 월 보험료 200만원의 변액유니버셜보험에 가입했다.
보험설계사가 시키는 대로 회사를 계약자로 내세워 보험료를 납부하도록 했다. 또 보험의 대상(피보험자)을 자신으로 한 다음,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보험금을 받게 될 수익자도 회사로 지정했다. 보험금이 회사에 돌아가도록 한 이상 문제될 게 별로 없는 셈이다.
그러나 A씨의 진짜 속셈은 이게 아니다. 퇴직 직전에 보험 계약자와 수익자를 자신의 이름으로 바꾸면, 그때까지 납부한 보험료와 보험금은 모두 자신의 것이 되는 것. 보험상품은 계약자, 수익자, 피보험자 세 사람만 합의하면 쉽게 명의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사들이 대부분 자신의 친인척이기 때문에 문제 삼을 사람도 없다. 임원 퇴직금 지급규정만 살짝 고치면 된다. 가지급금을 무리하게 꺼내 쓰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에 비하면, 이 방법은 합법적으로 차곡차곡 회사 돈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A씨 사례처럼 최근 생보사들 사이에 영업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소위 ‘CEO퇴직플랜’이라는 이름으로 중소기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편법적인 보험상품 판매가 활개를 치고 있다.
보험사들이 드러내놓고 판매는 못하지만, 개별적인 접촉을 통해 암암리에 계약을 성사시키고 있다. 모 보험 독립대리점의 보험설계사는 “사실상 합법적으로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이라며 “중소기업주들 가운데 이런 제안에 솔깃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보험컨설턴트는 “일부 기업체 사장들은 소문을 듣고 세무사까지 데리고 와 회사 자금을 개인적으로 챙길 수 있는 보험상품을 설계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보험업계에 따르면 보험상품 중에서도 의무납입기간 2년만 지나면 보험료를 중도 인출할 수 있는 변액유니버셜보험이 이런 용도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보험상품을 이용한 이 같은 편법은 세금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 보험 환급금 만큼 퇴직금을 추가로 받을 수 있도록 정관만 고치면 이는 합법적인 퇴직금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환급금 만큼 회사가 기업주에게 증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증여세를 물어야 하지만, 퇴직소득세만 내면 된다.
퇴직소득세는 공제도 많고, 세율도 증여세에 비해 훨씬 낮다. 기업주가 다른 임원들까지 동원하면 세부담을 피하면서 빼돌릴 수 있는 돈의 규모는 훨씬 늘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편법에 대해 제재할 수단이 거의 없다는 점. 한 대형 보험사 관계자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기업에서도 이사회 의결 등의 절차를 밟기 때문에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 박창종 보험감독국장도 “보험상품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임원 복지 차원에서 결정한 일이라면 감독당국으로서도 개입하기 곤란하다”고 말했다.
사실상 회사 자금을 빼돌리는 횡령에 해당되지만, 회사 내부에서 고소를 하지 않는 한 이 같은 회사 자금 빼돌리기에 대해 제재할 방법이 없는 셈이다.
광주=안경호기자 khan@hk.co.kr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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