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정모(26)씨는 얼마 전 서울 용산 전자상가에서 국내 대기업 S전자 LCD모니터를 30만원에 샀다. 시중가는 물론이고 인터넷 최저가보다도 3만원이나 저렴했다. 그런데 1달 만에 화면이 일그러지고 누렇게 변했다.
고장은 전압차이 때문이었다. 국내 전압은 220V인데 정씨가 구입한 제품은 유럽에서 통용되는 240V였다. 하지만 수리 센터에선 “국내 정식 판매품이 아닌 ‘역수’ 제품이니 판매처에 애프터서비스(A/S)를 문의하라”고 했다. 부랴부랴 1년 A/S를 약속한 판매처를 찾았지만 이미 문을 닫은 뒤였다. 그는 “보상 받을 길이 없다”고 후회했다..
수출품이 ‘역수(역수입)’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오고 있다. 심지어 수출품이 밀수품으로 둔갑하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 마크를 달고 외화를 벌어와야 할 수출품이 제 몫을 못하고 버젓이 국내에서 팔리고 있는 것이다.
마진을 노린 얄팍한 상술과 세관의 허술한 관리 때문이다. 해외 판매가와 국내 판매가 차이를 악용하는 수법은 크게 ‘수출품 밀수’와 ‘역수’ 등 2가지. 가전제품, IT 제품, 전자기기 부품과 담배 등 품목을 가리지 않는다.
수출품 밀수는 수출품 가격이 해외에서의 가격 경쟁 때문에 내수품보다 통상 싸게 책정되는데다 국세 및 관세까지 면제되는 점을 노린 신종 밀수다. 최근 부산에선 수출품이 부두에서 밀수품으로 탈바꿈한 뒤 시중에 유통되는 수출품 밀수가 빈발하고 있다. 담배는 10배, 웬만한 가전제품은 30%까지 시세차익을 노릴 수 있다고 한다.
무역업자 김모(40ㆍ부산 중구 중앙동)씨는 2001년 5월부터 최근까지 러시아로 수출하는 조건으로 전자제품 회사인 L사로부터 냉장고 세탁기 등 전자제품 5,746대(12억원 상당)를 시중가보다 15~40% 싸게 넘겨받아 국내에 유통시켰다.
김씨는 소규모 선사(船社)를 통해 러시아로 출항하는 외항선박에 실제 선적한 것처럼 가짜서류를 작성해 세관의 눈을 속였다. 부산경남본부세관과 국정원 부산지부는 김씨가 205회에 걸쳐 수출품을 빼돌려 2억여원의 차익을 올린 뒤에야 그를 관세법 위반혐의 등으로 적발했다.
지난해 7월엔 김모(46)씨 등 4명이 담배 수입상으로 가장해 ‘에쎄 라이트’ 등 시가 22억5,000만원 어치의 국산 면세담배 125만갑을 동티모르(수출가 1갑당 300~400원)에 수출하는 것처럼 속인 뒤 시중에 빼돌려 15억원 상당의 부당 이익을 올렸다.
관세청은 최근 맥주 등 일부 품목에 국한됐던 수출품 밀수가 전자제품, 담배 등 국산품 전 영역으로 확산되자 특별단속에 나서는 등 대책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그러나 관세청 관계자는 “국산품 밀수는 아직 건수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아 필요성을 못 느꼈다”고 했다.
역수 또한 다시 수입하는 운송비를 빼고도 남는 장사이기 때문에 활개를 치고 있다. 중국, 동남아 등 상대적으로 가까운 나라로 가는 수출품을 현지 수입상으로부터 사들여 바로 국내로 역수출하는 수법이다.
PC용 부품 등이 특히 많다. 가격차가(20~30%) 크고, 개당 부피가 크지 않아 운송비도 많이 들지 않는다. 돌아온 제품들은 용산 등 유명 전자상가에서 아무런 제재 없이 팔리고 있다.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의 몫이다. 특히 가전제품은 사용환경에 민감한데 외국의 여건에 맞춰 제조된 제품을 국내에서 장기간 사용했다간 고장 나기 십상이고 화재위험까지 있다.
일례로 유럽으로 수출되는 전자제품은 주파수(국내용 60㎐, 수출용 50㎐) 및 전압(국내용 220V, 수출용 240V)이 다르다. 싼 맛에 덜컥 샀다가 문제가 생기면 A/S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대책은 전무한 실정이다.
부산=김창배기자 kimcb@hk.co.kr정철환기자 ploma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