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에서 이미 나와 있는 역본(譯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좀더 나은 번역을 위해 반드시 건너야 하는 징검다리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국내 학계는 그런 분위기를 썩 반기지 않는 분위기입니다.”
중국 명대 역사를 전공한 박원호(62) 고려대 사학과 교수는 최근 최부(崔溥ㆍ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 새 역주본(고려대출판부)을 내놓으면서 조금 새로운 시도를 했다.
충실한 역주본 한 종 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표해록’ 연구서인 ‘최부 표해록 연구’(고려대출판부)를 함께 냈기 때문이다. 연구서는 현존하는 ‘표해록’ 판본 조사 내용과 그간 국내외에서 나온 ‘표해록’ 번역서의 성과와 문제를 세세하게 짚어 특히 눈길을 끈다.
1990년대 이후 언론을 통해 널리 소개돼 대중에게도 친숙한 ‘표해록’은 사연이 독특한 기행록이다. 성종 때인 1487년 제주에 부임한 최부는 이듬해 정월 부친상을 당해 고향인 전라도 나주로 급히 돌아가다가 풍랑을 만나 중국 저장(浙江)성 닝보(寧波)부에 표류했다. 왜구로 몰리는 등 온갖 고난을 겪고 반년 만에 귀국한 그에게 성종이 보고 들은 것을 모두 기록해 올리라고 명령해 만든 기록이 ‘표해록’이다.
자료 가치가 높아, 90년대 초반부터 ‘표해록’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중국의 거전자(葛振家) 베이징대학 교수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옌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더불어 ‘표해록’을 3대 중국 여행기로 꼽을 정도다.
하지만 ‘표해록’은 일찌감치 국내에서보다 해외에서 먼저 가치를 인정한 책이다. 가장 먼저 나온 번역본은 일본 에도(江戶)시대 유학자 기요타 기미카네(淸田君錦)가 낸 ‘당토행정기’(唐土行程記). 박 교수는 “1769년 나온 이 역본은 돈벌이가 될 거라고 생각한 출판사의 권유로 번역이 시작되었고 그렇게 나온 책이 상업적으로 팔렸다”며 “당시 일본이 얼마나 중국에 대한 정보에 굶주렸던가를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최초의 학술적인 번역은 놀랍게도 존 메스킬이란 미국학자가 해냈다. 1950년대 일본에 유학한 메스킬은 일본에 남아있는 현존 최고(最古)의 임진왜란 이전 ‘표해록’ 판본을 모두 참고하여 영어로 옮겼고, 그 번역본을 1958년 컬럼비아대학에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했다.
국내에는 1964년 북한의 김찬순 역본(중요한 부분만 옮겼다)을 시작으로 민족문화추진회의 ‘국역 연행록 선집’에 수록된 이재호 역본(최초의 한글 완역ㆍ76년), 가장 많이 읽힌 최기홍 역본(79년), 학술적으로 체계를 갖춘 서인범ㆍ주성지 역주본(2004년)까지 5종 정도가 있다.
박 교수는 메스킬 역본부터 서인범ㆍ주성지 역주본까지 7종을 검토한 뒤 “누가 보더라도 분명한 오역부터 거의 오역에 가까운 역문, 오역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적절한 뉘앙스를 살리지 못한” 부분들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메스킬은 최부를 가리켜 ‘차한’(此漢ㆍ이 사람아)이라고 부른 것을 ‘These Chinese’로 잘못 옮겼다.
서인범ㆍ주성지 역주본은 ‘如鮑作干家者’(보자기-바다 속에 들어가 조개 미역 등 해산물을 채취하는 사람-의 집 같았습니다)를 ‘말린 고기를 만드는 집인 듯했다’로 잘못 번역했다는 것이다. 그는 “경우에 따라 어느 쪽이 더 나은 역문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것도 있을 것”이라면서 “이런 번역 비평을 토대로 ‘표해록’이 15세기 동아시아사 연구에 국제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사료로 자리매김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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