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컸던 탓일까. 충격과 논란의 화제작으로 알려진 ‘눈물의 역사’(10~12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는 썩 만족스럽지 않았다.
첫날 객석의 박수는 뜨뜻미지근했다. 지난해 아비뇽 페스티벌에서는 기립박수와 야유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는데, 이날 관객들은 점잖았다.
호평이든 실망이든 열띤 반응은 없었다. 다만, 유명한 괴짜 화가 김점선씨가 큰 소리로 투덜댔다. “아, 속았다. 집에서 그림이나 그릴 걸. 이제부터 나는 불어를 증오한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 작품이 언어 텍스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지적은 많다. 무용평론가 박성혜씨는 “기존 상식을 깨부수는 전복적 연출에 충격을 받았다.
무대의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고 말하면서도 “언어를 과다하게 사용한 건 불만”이라고 덧붙였다.
벨기에 예술가 얀 파브르가 만든 이 작품은 눈물의 탐구이자 이를 통한 문명 비판이다. 여기서 눈물은 국부의 눈물(오줌)과 피부의 눈물(땀)을 포함한 것이다.
그는 체액 곧 몸을 억압하고 거부해온 이성 중심의 역사에 반론을 제기한다. 문제는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인데, 한 마디로 말이 너무 많다.
몸으로 무대로 보여주면 될 것까지 장황한 대사로 끈질기게, 너무 친절하게 설명함으로써 상상력을 반감시켰다. 신선하고 아름답고 더러 역겨운 장면들의 강렬한 광채가 언어에 짓눌린 느낌이 없지 않다.
이 작품은 전라의 무용수, 무대 위 방뇨 같은 도발적인 표현 방식으로 더 화제가 됐지만, 무용이라기보다는 연극에 가깝다.
극을 이끌어가는 세 인물(절망의 기사, 바위, 개)은 시적이고 사변적인 대사를 90분 내내 읊조린다.
절망의 기사는 메마른 세상에 닥칠 재앙을 예고하며 눈물의 힘, 곧 구원을 역설한다.(사진) “나의 땀, 나의 오줌, 나의 눈물은 나의 말보다 더 큰 의미가 있지.”
그런 메시지를 몸보다 말로 계속 떠드는 건 아이러니다. ‘눈물의 역사’는 무대라는 책 위에 쓴 철학이다. 그러나 아무리 진지한 담론이라도 지나친 장광설은 지루하다.
오미환 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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