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앞두고 유럽은 한껏 고무돼 있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 계몽 정신의 확산 등으로 합리적, 이성적 세계가 도래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신기루였다. 두 차례의 세계 대전,아우슈비츠의 인종 청소 그리고 냉전 체제. 그렇다면 이렇듯 비이성적이고 폭력적인 세상에서 철학은 무엇을 했을까.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교수의 ‘20세기 서양 철학의 흐름’은 지난 세기 서양 철학이 어떻게 기능했고 어떻게 대립, 분화했는지를 살피는 철학 서적이다. 내용, 편집 모두 지나치게 어렵거나 복잡하지 않아 교양서로 읽어도 좋다.
20세기 철학이 새로운 국면에 맞은 것은 1차 대전 때문이었다. 철학은 파국 속에서 아무 역할도 못하는 무기력증 환자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러시아 차르 체제가 붕괴되고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전면에 나섰으며, 논리실증주의가 등장하면서 형이상학이 종말을 고했다.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은 유대계 철학자를 선택의 기로로 내몰았다. 망명할 것인가, 남아서 죽을 것인가. 이 때 발터 벤야민은 자살을 결심하지만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이 되고 호전적 애국주의를 옹호한다. 전쟁 후에는 칼 야스퍼스, 한나 아렌트, 장 폴 샤르트르,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에 의해 반계몽적 퇴행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전개됐다.
곧 이어 다가온 냉전의 시대. 철학은 세계를 변혁하기 보다 이해하는데 주력해야 한다며 현실을 회피했다.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는 철학자도 소수였다. 이런 가운데서도 전통적인 자유주의를 수호하는 칼 포퍼, 레몽 아롱, 궁극적으로 자유가 자유주의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긴 사르트르, 제3의 길을 모색한 마르쿠제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루이 알튀세르 등이 돋보였다.
박광희기자 khpark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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