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지천해서 통속의 허방에 위태로운, 그럼에도 지치지도 질리지도 않고 호흡처럼 이어지는 호모사피엔스의 사랑 타령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 징하디 징한 사랑에의 예술적 추구에 대해,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속의 시간에 대한 발언을 빌려 설명한다. “(다 안다고 생각하며 살지만) 누군가로부터 그것(시간 혹은 사랑)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잘 모르기 때문에 예술이 되고, 잘 모르기 때문에 그 예술을 누린다는 것이다.
잘 모르는 그 ‘사랑’에 통속이 개입할 여지는 희박하다. 오히려 제대로 모르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면서부터 사랑의 통속, 그리고 통속의 사랑이 잉태되는 것이다. 쥐스킨트의 신작 시나리오 ‘사랑의 추구와 발견’과 에세이 ‘사랑을 생각하다’(열린책들, 각 8,500원 7,500원)는 그 사랑의 알 수 없음에 대한 해명이다.
2004년 독일에서 영화로 제작된 이 시나리오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페의 비극적 사랑 신화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작품이다.
첫 눈에 사랑에 빠진 작곡가 미미와 가수 지망생 비너스.
비너스: 우리 이제 사랑하는 거죠, 항상 그리고 영원히?
미미: 항상 그리고 영원히!
미미는 자신의 모든 예술적 정열을 쏟아 비너스를 최고의 오페라 가수로 만들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대개의 사랑이 그러하듯, 파국을 맞는다. 상실의 아픔과 공허함에 미미는 자살하고, 뒤늦게 사랑을 깨달은 비너스는 ‘오르페우스의 길’을 택해 하데스의 세계를 찾아 나선다. 명계(冥界)를 울리는 혼신의 노래로 되찾은 사랑은, 이번에는 신화의 그것처럼, 두 사람의 어이없는 말다툼 끝에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신화처럼 위대한 사랑도 사소한 의견차이로 끝나버”리는 사랑의 취약성, 두려움 없는 맹목의 분출도 작은 자존심 앞에서 허망해지는 그 아이러니. 에세이에서 쥐스킨트는 사랑이란 아름다움과 선함 행복 완전함 불멸성과 같은 신의 특성을 동경하게 하지만, 거꾸로 맹목적 추종과 도취이기도 한 그 모순으로 존재함을, 괴테와 노발리스, 바그너의 예술을 통해 이야기한다. “혹시 사랑은 독이 아닐까? 양이 얼마냐에 따라 가장 큰 축복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하는 그런 독 말이다.”
한편 소설가 박청호는 ‘사랑의 수사학’(작가정신, 7,900원)을 통해 카사노바처럼 부유하는 정념의 남자와, 남자의 모든 영혼을 독점하려는 여자의, 욕망과 사랑의 어긋남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자에게 사랑은 ‘쾌락의 교환’일 뿐이다.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의 하나로 ‘사랑’을 고른다. “(대상으로서의 여자들에게) 성적 차이 따위는 없다.…가끔은 인간은 없어지고 해골 같은 섹스 자체만 남아있다. 몸이 만든 폐허를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바라본다.”(26쪽) 하지만 여자는 남자의 모든 것을 전유하고자 한다. 그 욕망은 한편으로, 남자의 ‘사랑’을 억압하는 또 다른 폭력이 된다.
하지만 작가는 사랑이 ‘메시아’와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항상 불가능하며 이미 겪어왔지만 늘 아니었다고 부정하면서, 그러나 언제나 사랑에 목말라 하며 한 번만 더 겪게 된다면 죽어도 좋다고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141쪽),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쥐스킨트가 신화와 문학의 프리즘을 통해 세속적 사랑의 모순성과 초월적 의미를 비춘다면, 박청호는 ‘사랑의 수사학’이 엇갈리는 욕망의 정당화 논리와 다르지 않음을 사유적 문장으로 서사화한다. 허름한 사랑,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사랑의 난해함이 우리의 사랑에 대한 집착의 동력일까. 그것이 사랑을 갈구하는 호모사피엔스의 운명일까.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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