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2월이면 그리고 14일이면 ‘밸런타인데이’라고 해서 모두들 떠들썩해진다. 사랑을 고백하고 초콜릿을 먹고 또 사랑을 확인하고 그러는 날이라고 하는데, 누가 정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이들을 들뜨게 만드는 것은 분명하다.
초콜릿 업체들이나 백화점들의 마케팅은 마치 밸런타인데이에 하트가 대기 중을 떠다니기라도 하는 듯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그 국적과 역사에 의견이 분분한 기념일로 많은 매출을 올린다.
여학교 생활 6년을 했던 나의 10대를 돌아보면, 밸런타인데이마다 남자 선생님들의 인기는 백일하에 드러났었다. 요즘에야 초등학생도 ‘여친, 남친(여자친구, 남자친구를 칭하는 인터넷 상의 줄임말)’이 있다지만 내가 여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우리는 아직 순진했던 거다.
500원짜리 ‘가나’ 초콜릿을 리본으로 묶어 머리가 희끗희끗한 윤리 선생님, 창백한 피부의 미술 선생님께 내밀던 그 얼굴들이 문득 떠오른다.
♡ 핫 초콜릿
고 3때부터 사귀었던 첫 남자친구와 초콜릿을 주고받던 대학 시절 이후, 나는 밸런타인데이와 별 인연이 없었다. 20대 내내 ‘독신주의’를 멋모르고 고집했던 나는 ‘교제는 길지 않게, 이별은 깔끔하게’라는 나름의 철칙에 의거하여 연애를 했었다. 연애 기간이 좀 길어진다 싶으면 ‘결혼’의 기역 자(字)가 튀어나올 확률도 높아지는 것이라 지레 겁을 먹고 살았다.
모난 성격에, 감정의 기복이 들쭉날쭉한 AB형 여자는 변덕도 심하고 제 멋대로라서 만남도 이별도 예측이 불허였는데, 이상하게도 3월에 만난 사람도, 9월에 만난 사람도 해를 넘길 때까지 연애를 지속하기가 힘들었다.
자연히 매년 2월에는 강의와 강의 사이에 붕 뜬 ‘공강’시간과 같은 ‘공애(空愛)’ 기간일 때가 많았고, 그 때마다 나는 ‘핫 초콜릿’을 만들어 마시곤 했다.
핫 초콜릿이란 순도 높은 초콜릿을 끓는 물에 저어가며 중탕으로 녹이고, 그 원액에 따뜻이 데운 우유를 천천히 섞어 내는 음료. 핫 초콜릿에 우유를 베이스로 한 리큐르라도 한 모금 섞어 넣으면 카카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성분에 나른한 알코올까지 더해져 부드러운 잠으로 나를 이끌어 주었었다.
♡ 수제 초콜릿
수 년 간의 연애 패턴에 의하면, 나는 누군가를 만나고 그 만남이 연애로 이어질 확률이 겨울보다는 봄, 봄 보다는 늦여름에 더 많았던 사람이었다.
아마도 내 감정의 선(線)이 그런 모양으로 생겼으리라 짐작해본다. 봄이면 모든 것이 마냥 달고 예뻐 보이고, 가을이 올락 말락하는 늦여름이면 또 감상적이 되곤 하니까. 추위에 유난히 약해서 겨울만 되면 연애고 뭐고 다 귀찮아지는 내 체력적 한계 때문에 20대 때는 겨울마다 동면(冬眠) 하듯 지냈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난 것은 그런데 겨울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밸런타인데이에 우리는 이미100일짜리 연인이 되어 있었다. 너무나 상업적이고 상투적인 날이라 오히려 꼼짝도 하기가 싫다는 나를 그는 혜화동의 ‘낙산공원’으로 불러냈다. 아직 연애의 초반이어서 ‘본성(!)’을 들어낼 수 없었던 나는 ‘사람 참 귀찮게 만드네.’ 하면서 혜화동 길을 올랐다.
날이 너무 추워서 외투 주머니의 캔 커피 두 개를 만지작거리며 십 분쯤 걸으니 그 꼭대기에 그가 있었다. 낙산 공원을 두르고 있는 성곽 아래 아예 터를 잡고 나를 위해 준비했다는 선물을 펼쳐(?) 놓고 말이다.
그가 준비했던 선물은 진짜 가마에서 구워 낸 묵직한 그릇들과(카드에는 이 그릇에 담긴 나의 요리를 먹고 싶다고 쓰여 있었다) 붉은 색의 스카프 뭐 그런 것들이었는데, 개당 무게가 반 ㎏씩은 되는 토기 접시들을 몇 개씩 들고 그 높은 곳까지 올라 마른 땅에 붉은 스카프 깔고 그 위에 선물들을 세팅하며 나를 기다린 무모한 로맨티스트를 보고 나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그런 무모한 열정과 일관된 정성으로 우리는 그 다음 해에도 밸런타인데이를 함께 보낼 수 있었는데, 그 때는 내가 초콜릿을 만들었다. 중탕으로 녹인 초콜릿을 하트 모양의 틀에 넣어 굳히고 계피와 설탕을 섞어 만든 장식용 당(糖)으로 장식한 심플한 선물이었다.
수제 초콜릿을 처음 먹어 본다며 흥분하던 그가 내민 선물은 낡은 레코드 판. ‘금지된 장난’이라는 1950년대 흑백영화의 주제곡이 담긴 음반이었는데, 내가 ‘금지된 장난’의 꼬마 여주인공 뽈레트를 닮았다고 놀리던 그는 중고 레코드 상을 뒤져 뽈레트의 주제곡을 구해온 것이었다.
부부가 되어 함께 맞는 올 밸런타인데이에는 ‘우리’의 집에서 내가 만든 초콜릿과 지난 가을 담근 무화과주로 상을 차리고 ‘금지된 장난’ DVD를 보기로 했다.
뻔하고 흔한 기념일이지만 남편과 만들어 온 추억을 더듬다 보니 1년에 하루쯤은 ‘세상 모두가 사랑하는 날’이라 정해 놓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된장찌개에 밥을 비?먹은 것이 어제 낮이었는지, 그제 저녁이었는지도 기억도 안 나게 돌아가는 생활가운데 하루라도 말랑해지고 유치(幼稚)해 질 수 있다면 10년이 지난 후에도 그 날만은 기억해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초 간단 수제 초콜릿
다크 커버쳐 초콜릿, 생크림, 꼬냑이나 그랑 마니에르, 누가, 코팅용 초콜릿
1. 다크 초콜릿을 메탈 볼에 담고 끓는 물이 담긴 냄비에 넣어 중탕으로 녹인다.
2. 1이 다 녹으면 따뜻하게 데운 생크림을 넣어가며 젓는다.
3. 2에 꼬냑이나 그랑 마니에르 술을 몇 방울 떨어뜨린다.
4. 3의 초콜릿이 뻑뻑해지면 짤 주머니에 넣어 짜거나 틀에 채우거나 티스푼 두 개를 이용해서 자연스러운 모양으로 유산지 위에 떠 놓는다.
5. 4를 서늘한 곳에서 굳힌 다음 유산지나 틀에서 분리시킨다.
6. 코팅용 초콜릿을 녹인 다음 5의 초콜릿을 담그고 겉을 코팅시켜 건져 유산지 위에서 말린다.
7. 6의 초콜릿이 완성되면(손에 묻지 않는 상태) 호일이나 유산지로 감싼 다음 박스에 넣는다.
* 코팅용 초콜릿 대신 코코아 파우더나 녹차 가루에 굴려도 된다. 꼬냑이나 그랑 마니에르를 곁들여 마시면 멋지다
푸드채널 ‘레드쿡 다이어리’ 진행자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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