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한 잔 시켰는데 너무 오래 걸리는 거 아냐?’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있는 카페 ‘커피스트(Coffeest)’에 멋모르고 들른 사람들은 불만을 터뜨릴 만 하다. 커피 한 잔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이 4분. 3명이 서로 다른 종류를 시키면 꼬박 12분이 걸린다. 이상한 카페다.
카운터 뒤에서 말없이 커피를 볶아대는 조윤정(37)씨가 주인이다. 커피를 볶다가 고객이 들어오면 메뉴판을 들고 나선다. ‘이디오피아 모카 요가체프’, ‘인도네시아 가요마운틴’ 등 30개에 달하는 메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고객들의 마음을 읽고 있는 걸까? 잠시 침묵하다가 살며시 입을 연다.
“특별히 좋아하는 커피 종류가 있으세요?” “산뜻한 게 좋으세요, 아니면 묵직한 느낌을 원하세요?” “진하게? 아니면 연하게 해드릴까요?” 고객의 취향에 맞는 맞춤 커피가 만들어진다. 바로 요즘 트렌드에 맞는 ‘나만의 무엇’이다.
조윤정씨는 표정에서부터 진한 커피 냄새를 풍긴다. 카페 이름마저 ‘커피 마니아’를 넘어선 ‘커피주의자(Coffee+ist)’이다. 커피와 무슨 인연이 있길래. 그가 궁금해졌다.
성심여대 사회학과를 나온 조씨는 원래 문화연구와 글쓰기에 관심이 많았다. 연세대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소설가나 방송작가를 꿈꿨다. “그러던 중 또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심이 생겼지 뭐예요. 어떻게 관심 분야가 이리저리 바뀌었냐고요? 그래 봐야 비슷한 영역들이잖아요. 그 주변만 맴돌았지요.”
그는 대학원 졸업 무렵 성심여대 연구소에서 1년간 성(性) 평등 관련 영화를 상영하거나 간담회 등을 진행했고 그 사이 단편영화도 한 편 찍었다. 그러다 97년 결혼 후 남편과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다.
“처음 4개월은 어학공부만 했는데 정말 재미가 없었어요. 둘이 공부하기에 학비도 너무 많이 들고. 생각 끝에 일단 직장을 구해보기로 했죠.”
어렵게 구한 첫 직업은 호텔 청소부. 2시간 동안 무거운 매트리스 20개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침대 시트를 갈고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결국 한 달을 넘기고 못하고 새로운 직장을 찾았다. 이번엔 호텔 블랙퍼스트 웨이터리스. 나름대로 재미를 붙여가던 중 덜컥 임신을 하는 바람에 그 일도 그만 두어야 했다. 귀국해 출산을 하고 시댁에 아이를 맡긴 후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들어간 회사가 바로 커피회사 ‘몬머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이 뒤집혔다.
“커피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마니아는 아니었어요. 지루한 일반 회사에 비해 커피회사는 아주 흥미롭더군요. 매일 배우는 일이 새로웠고, 때때마다 바뀌는 커피 맛은 도전장을 내밀기에 충분했어요.”
커피회사 취직도 쉽게 이뤄지진 않았다. 이력서를 보냈으나 답이 없어 직접 담당자를 만나러 갔다. 즉석 인터뷰를 마친 후 바로 매장 일을 했다. 동료들의 반대가 없어야 취직이 가능한 곳이었다. 시키는 대로 꼬박 3시간을 일 한 후 연락하겠다는 답을 받고 나왔다.
“취직 후 알고 보니 말없이 허드렛일을 한 덕이었어요. 어느 직장이나 불평 없이 밑작업 잘하는 신입은 좋아하잖아요.”
공식에 맞춰 커피를 따라내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커피 만들기는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에스프레소를 잘 만들려면 거품을 잘 내야 했고 빈을 팔려면 커피 맛을 제대로 알아야 했다. 그저 이론만 줄줄 외워서는 될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 커피 만드는 일을 배우고 커피 판매 법을 배운 후에는 주문을 받아 배송하는 일도 했다. 꼼꼼히 배우는 데 꼬박 1년이 걸렸다.
마지막 관문은 가장 힘들다는 로스팅(커피 볶는 일). 이 일은 아무에게나 기회가 돌아가지 않는다. 해보고 싶다는 말은 여러 차례 흘렸지만 주인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근무하던 로스터가 그만두자 후배 영국인 동료에게 기회가 돌아갔다.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틈만 나면 주인에게 하고싶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조르기만 3개월. 드디어 기회가 왔다. 1주일에 2~3번의 로스팅 기회를 받았다. 사장은 일단 능력을 시험하겠다고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로스팅은 볶아지는 소리를 듣고 색깔도 보고 냄새도 맡고 깨물어도 봐야 하는 갖가지 감각이 한꺼번에 필요한 힘든 작업이에요. 기분에 따라, 온도에 따라, 외부환경에 따라 변수가 심한 것, 그게 커피 만들기 였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커피의 맛을 일관성 있게 만드는 게 로스터의 능력이었다. 시거나 쓴 원두 저마다의 특징을 최대한 살리는 게 제 맛을 내는 비결. 내부를 얼마나 익히는 지, 타는 물은 몇 도인지, 누가 어떤 조건에서 마시냐 까지 로스터는 책임져야 한다.
“커피를 만드는 것만이 좋은 건 아니에요. 고객들과의 관계,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대화, 그게 문화거든요. 그 현장 또한 큰 매력이었어요.”
로스터를 1년 반 정도 하니 감이 생겼다. 2002년 9월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인터넷을 뒤져 커피 볶는 집만 찾아 다녔다. 도저히 로스터로 취직이 안되자 그는 일을 벌이기로 했다. 2003년 6월 이대 전철역 부근에 25평짜리 사무실을 얻고 1,300만 원짜리 로스터기를 사들여 커피를 팔았다.
어려웠다. 아는 사람의 도움으로 규모를 줄여 다시 사직동으로 옮겼으나 그것도 생각만큼 안돼 지금의 장소로 이사했다. ‘행복을 리필해 드립니다(refill your happy)’라는 로고가 박힌 이 장소가 세 번째 ‘커피스트’다. 이제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찾아온다. 한번 온 사람은 꼭 다시 온다. 하루에 4번씩 찾는 고객도 있다.
15평 규모의 이곳에는 예쁘게 마른 나뭇잎 한 장, 예쁜 자기 하나 등 앙증맞은 소품 하나 하나가 곳곳에 진열돼 있다.
“사람이 우선인 공간입니다. 커피를 찾는 주연들이 빛나는 곳. 난 그들을 도와주는 조연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는 커피를 갈고 한 잔을 내리면서 매번 기도한다. 정말 맛있는 커피를 내리게 해달라고, 또 그 향과 함께 그들의 삶을 감동스럽게 해달라고.
“신선한 커피는 굉장히 향기로워요. 그 향과 함께 사람들에게 늘 행복을 주고 싶습니다. 피곤한 일상에서 쉬어가는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커피와 행복을 리필해 드려요.”
이화여자대학교 평생교육원 커피전문가 과정 지도교수이이기도 한 조윤정씨는 오는 9월 커피의 역사와 문화, 추출법 등을 초보자에게 소개하는 커피 개론서도 낼 계획이다.
이런 날에는 이런 커피를 마셔라
▦ 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날
이디오피아 모카 요가체프. 비가 오는 날, 와인의 정취가 풍기는 시큼한 이디오피아를 마시면 그 향기가 빗속에서 춤추는 것만 같다.
▦ 눈이 내리는 날
과테말라 훼훼테넨고 오가닉. 우유 속에 녹아드는 초컬릿의 달콤함처럼 진하고 쌉쌀한 맛이 무척 감미롭다.
▦ 혼자임이 즐거운 날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만데링 G-1. 흙 냄새가 강하면서 스파이시한 맛을 낸다. 씁쓸하게 혀끝이 울릴 때 혼자임이 짜릿하게 행복하다. 진하면서 쓴맛이 강해 남성적인 커피라 불리는데 이 한잔의 커피는 그 어떤 사람과도 바꿀 수 없다.
▦ 행복해 지고 싶은 날
케냐AA. 케냐는 귀족적인 커피이다. 귤이나 포도에서 느끼는 산뜻한 신맛. '우아를 떨며' 살짝 새침해져도 좋은 케냐는, 어깨를 으쓱하며 내가 귀중한 사람임을 일깨워 준다.
▦ 언제나 늘 마시고 싶은
콜롬비아 후일라 수프리모. 단맛과 쓴맛, 신맛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우아하고 부드럽다. 튀지 않아 편안한 그녀처럼.
조윤정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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