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중한 오르간 선율에 맞춰 감색 가운에 진녹색 졸업모 차림의 졸업생들이 줄지어 단상에 오르자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들이 환한 얼굴로 이들을 맞는다. 한명 한명의 이름이 불려지고 “수고했다”는 덕담과 함께 졸업장이 주어진다.
500여명의 졸업장 수여식에만 30분. 지루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게 전부다. 사회자도, 졸업식하면 떠오르는 상장 수여식도 찾아볼 수 없다. 대형 스크린에 뜨는 식순에 맞춰 모든 진행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이어진다.
9일 열린 서울 현대고 졸업식의 풍경이다. 이 학교는 올해부터 상장 수여식을 없애기로 했다. ‘졸업식은 모든 졸업생을 위한 행사여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졸업식이 성적이 우수한 일부 학생들만을 위한 반쪽 행사로 전락한 현실에서 새로운 졸업 문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의도에 공감이 간다. 개교 때부터 졸업가운과 모자를 착용한 것도 학생들에게 졸업이 주는 의미와 무게감을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안홍원(18)군은 “‘나’를 위한 졸업식이라는 느낌을 받았다”며 “졸업식의 주인공은 학생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행사를 지켜본 학부모 이회영(46)씨도 “고교 졸업식 하면 으레 밀가루 뿌리기 등을 생각했었는데 한명 한명의 이름을 불러주는 모습에서 마지막까지 학생을 책임지려는 학교의 배려가 느껴진다”고 칭찬했다.
졸업식이 변하고 있다. 형식주의를 벗어나 졸업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내실 있는 행사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형식의 파괴.
축사, 답사, 표창 등 천편일률적인 졸업식 메뉴를 과감히 생략하고 졸업생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행사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현대고처럼 졸업생 전원에게 일일이 졸업장을 수여하는 학교도 늘고 있다.
올해 첫 졸업생을 배출하는 충북 청주시 흥덕고는 졸업식을 저녁 시간으로 잡았다. 학창시절 추억을 담은 타임캡슐, 촛불 의식 행사 등을 통해 첫 졸업의 의미를 간직하고 학생과 교사, 학부모가 모두 참여하는 축제의 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11일 졸업식을 치르는 충북 괴산군 청천중은 졸업생의 영상편지를 상영한다. 가슴 깊이 간직한 고마움과 감사의 뜻을 선생님과 부모님에게 드러내는 자리다.
미래의 희망과 배움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특색 있는 행사도 적지 않다. 서울 면동초등학교는 15일 졸업식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경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의도에서 졸업생 전원에게 도장과 개인 통장을 졸업선물로 나눠줄 계획이다. “어릴 때부터 합리적인 소비 습관을 기르고 목표 지향적인 삶을 설계하라는 숨은 뜻이 담겨져 있다”는 게 이광호(46) 교감의 설명이다.
9일 졸업식을 가진 서울 성지중ㆍ고에서는 한복 차림의 나이든 졸업생들이 등장했다. 성지중ㆍ고는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이나 배움의 기회를 놓친 성인 등 다양한 계층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다. 한복에는 졸업식이 단순히 학업을 마치고 학교를 떠나는 날이 아니라 경사스럽고 축하해야 할 ‘잔칫날’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 밖에 학교의 기능적 특성을 살린 졸업식도 눈길을 끈다. 전북 전주시 한국전통문화고는 그림 공예품 전통의상 등 학생들이 직접 만든 작품 전시회로 졸업식을 꾸민다. 3년간의 성과에 대해 졸업생들 스스로 자부심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다.
중앙대 국악대도 학과 특성을 살려 서양식 학위복 대신 전통 복장을 입고 다채로운 국악 공연이 어우러진 예술 축제로 행사를 기획했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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