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벽두, 미국과 일본에 한발 뒤 처져 그들을 모방하기에 급급했던 우리 대중문화가 일본, 중국을 거쳐 동남아와 중동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열광과 공감을 폭넓게 이끌어내며 아시아의 신 실크로드를 열고 있다.
어떠한 기획이나 준비도 없던 가운데 불쑥 찾아온, 이른바 ‘한류’라는 새로운 현상. 이에 대해 아직까지 우리는 면밀한 분석과 이를 국가를 업그레이드하는 발판으로 삼는 전략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
1월1일부터 10회에 걸쳐 연재된 ‘아시아 문화 허브’ 시리즈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대중문화뿐 아니라 관광과 디지털 산업, 고급문화와 온라인 게임, 국가 브랜드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문화 강국이 되기 위한 과제들을 점검해 볼 기회였다.
시리즈를 결산하는 좌담에 ‘대장금’ 등 한국 드라마 수출에 앞장서온 박재복(46) MBC 글로벌사업본부 차장과 ‘한류’의 산업화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해온 삼성경제연구소 고정민 팀장, 드라마 외주 제작사인 에이트픽스의 송병준 대표가 참여했다.
최근 가수 ‘비’가 가진 뉴욕 공연에 대해 미국 주류 언론이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한류’의 세계화는 역시 쉽지 않은 과제인 듯싶다.
송병준: ‘비’와 그의 소속사는 미국 대중문화의 본류에 뛰어들어 그네들의 아티스트와 경쟁하겠다고 작심한 듯 보였다. 개인적으로 비의 실력이나 작사ㆍ작곡 능력은 미국에 안 뒤진다고 본다. 경쟁력은 충분히 있는데 아티스트의 인종이 어떠한가는 문제가 되는 듯하다. 아마 백인이 똑같은 노래와 춤을 선보였으면 그 파급력이 전혀 달랐을 것이다.
고정민: 문화적 장벽이 높은 미국시장 진출을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단, 보아처럼 시장에 진출하기에 앞서 철저한 시장 조사와 현지화, 미국 대중 음악의 최신 경향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했다. 대중음악의 경우 미국 시장을 석권한다는 것은 곧 세계를 석권한다는 뜻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단순히 한국 가수의 미국 진입뿐 아니라 미국인을 직접 캐스팅해 데뷔시키는 등 다양한 전략이 필요하다.
박재복: 아직 미국의 문화적 장벽을 뛰어 넘을 정도로 우리 콘텐츠가 현지에서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지 못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 대중문화 수출의 역사가 이제 10년에 불과하다는 점을 비춰보면 기초 공사만 잘한다면 가능성은 크다.
‘아시아 문화 허브’라는 전략적 담론의 필요성을 어떻게 보는가?
박: ‘금융’부터 ‘물류’까지 허브라는 단어의 사용이 빈발하고 있다. 문화 허브의 꿈도 간단치 않다. 일단 우리 문화 시장의 내수가 작은 게 걸림돌이다. 중화권 인구는 20억가량 되고 일본의 경우 인구는 1억 2,000만 정도지만 경제 규모로 환산하면 12억가량 된다. 자칫하면 시장을 내줄 수도 있다. 우리의 약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두 나라와 협력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고: 문화 허브라는 말이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경계심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하기만 한다면, 그간 거론된 물류ㆍ금융 허브에 비해 가장 현실성이 높다. 이미 ‘한류’가 형성되어 있고 일본을 뺀 나머지 모든 아시아 국가가 식민 지배와 전쟁, 경제와 민주주의 발전의 경험이 녹아든 콘텐츠를 만들고 있는 한국을 모델로 삼아 우리 문화를 수용하거나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 이들 수출 상품에 우리 문화가 집약적으로 녹아 있어서 한국에 대한 우호도가 높아지고 많은 아시아인과 연대감을 가질 기회가 마련되고 있지만 문화는 가치관과 종교, 언어의 집약적 산물이다. 드라마와 대중음악, 영화에 국한된 현상만으로 ‘문화 허브’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문화 제국주의로 비칠 수 있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일방통행 식 ‘한류’에 대한 경고음이 중국과 일본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문화 교류와 유연성의 강화가 필요하지 않은가.
박: 전 주중 대사가 이임사에서 ‘한국인들은 과대망상증에 걸려있다’고 지적한 대목은 ‘한류’에 대한 중국인들의 속내를 보여준다. ‘중국이 세상에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에 철두철미한 중국인이나 아시아 맹주의 자리를 양보할 수 없는 일본에서 ‘반한류’ ‘혐한류’ 이야기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이런 불만을 완화하기 위해서 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방송 콘텐츠를 수입하는 매체들에 대한 정책적 지원도 필요하다.
고: 일본 방송 애니메이션은 전 세계 시장의 60%를 차지하지만 ‘일류’(日流)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중국 문화도 세계 각국에 퍼져 있지만 ‘화류’(華流)로 지칭하지 않는다. 그들의 문화를 개별적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우리나라 문화 상품이 잘 팔리는 현상을 ‘한류’라고 특정화시켜서 상대국들의 경계심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내셔널리즘이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여러 문화가 한데 섞여 새롭게 창조된 ‘하이브리드 문화’를 갖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문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작업이 뒤따라야 한다.
송: 드라마를 만들다 보면 중국에서 공동 제작 의뢰가 아주 많이 들어온다. 그때마다 거절할 수밖에 없다. 중국 배우가 나오면 일단 지상파 방영이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너희 나라 배우가 나오면 한국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터라 곤란하다. 중국에서는 한국 드라마를 통째로 틀고 있는데 우리의 이런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겠는가?
이런 문제를 비켜갈 중요한 전략으로 부상하고 있는 공동 제작을 어떻게 보는가?
박: 최초의 한일 합작 드라마인 ‘프렌즈’의 경우 제작비가 단독 제작에 비해 2~3배 정도 들었다. 배우와 스태프들 사이에 통역이 필요하고 작가도 2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견해 차이로 작업에 속도도 늦었다. 본격적인 공동 제작이 힘들면 그전 단계로 공동 투자의 형태로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송: 이 부분에서도 우리는 약점이 많다. 공동 제작이라면 홍콩과 중국, 대만과 중국이 가능하다. 이들은 제작사가 힘을 합치면 시장이 2배 규모로 커진다. 그러나 한중 혹은 한일 합작은 두 시장을 모두 놓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것이 결정적인 한계다.
대중문화 콘텐츠의 경쟁력을 유지하는데 최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는 요인은 무엇인가?
박: 가격 거품이다. 드라마는 편당 2만 달러까지 가격이 올라갔다. 미국 방송 콘텐츠 가격의 3~4배 수준이다. 이러다 보니 대만과 일본은 자체 제작으로 돌아서고 있다. 다른 국가에서도 한국 방송 콘텐츠에 대한 확실한 선별 구매가 이뤄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지를 못하고 일시적인 성과에 취해 있다. 그렇게 가격은 높아지면서 작품의 질은 후퇴하고 있다. 출연료가 제작비의 대다수를 차지하면서 실질적으로 드라마 제작비는 줄었기 때문이다. 스타 위주의 한탕주의가 시장을 왜곡하고 있다.
고: 외국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서는 초기 투자비용이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스타들과 매니지먼트사는 이 비용을 인정하지 않고 미리 해외 시장에서 거둘 수 있는 수익분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대로 가다가는 대중문화 산업 전체가 무너질 수도 있다. 1차 콘텐츠 생산에 전력을 기울이기에 앞서 이를 통해 창출되는 부가 가치와 이익을 놓고 이전투구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송: 요즘 회당 출연료 2,000만원을 요구하는 연기자들이 부지기수다. 배우들 스스로 ‘자정’에 나서줘야 할 때다. 이대로 가면 끝장이다. 제작 능력과 기획, 극본의 내용을 따지기에 앞서 스타만 캐스팅하면 곧바로 편성을 보장해주는 지상파 방송사들의 구태도 고쳐져야 한다. 과감한 편성으로 신인을 기용하거나 특수한 소재를 살린 작품을 방송사들이 과감히 편성해야 한다.
결국 고급ㆍ전통문화의 전파, 국가 브랜드 가치 향상을 통한 경제적 효과 유발, 관광ㆍ서비스 산업의 업그레이드 등을 가능케 해줄 ‘아시아 문화 허브’의 꿈은 아시아인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이를 위해 손봐야 할 우리 사회 시스템에 대해 말해달라.
박: ‘한류 낙관론’과 ‘한류 비관론’이 번갈아 가며 제기되고 있는데 이건 코미디다. 그에 앞서 우리 내부에서 콘텐츠 생산 과정의 동맥 경화는 없는지부터 살펴보고 공급자 위주의 정책이 만들어져야 한다. 킬러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대중문화 분야에 대한 산업 육성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콘텐츠 생산자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교육 체계 마련이다. 대학의 커리큘럼은 콘텐츠 생산과 완전히 겉돌고 있다. 대중문화 콘텐츠 업계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이지만 교육인적자원부가 손을 놓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고: 시장의 구조를 왜곡시키는 지적 재산권 문제를 해결하고 시장의 원칙이 작동할 수 있도록 경쟁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급선무다.
송: 드라마 OST를 만드는데 한 작곡료는 건당 4만6,000원, 편곡료는 1만 4,400원에 불과하다. 10년째 그렇다. 지상파 방송사는 외주제작사를 여전히 심부름하고 캐스팅해오는 회사로밖에 하도급 업체로 밖에 여기지 않는 듯하다. 이런 전근대적 구조가 계속되면 경쟁력 있는 콘텐츠 생산이 어려워 진다. 현상만 보고 거기에 ‘한류’니 아니니 하는 딱지 붙이기에 앞서 현상의 뒤에 있는 본질을 파악하고 그 본질을 보호해주고 관리해 줘야 한다. 이 작업이 우리의 꿈에 다가서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진행ㆍ정리=김대성기자 lovelily@hk.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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