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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49) 이연주의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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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공화국 풍경들-고종석의 詩集산책] (49) 이연주의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

입력
2006.02.08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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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주(1953~1992)가 생전에 낸 시집은 '매음녀가 있는 밤의 시장'(1991. 이하 '매음녀')이 유일하다. 시인은 만 40세를 한 해 앞두고 스스로 삶을 버렸다. 문단 한 켠을 음산한 기운으로 쭈뼛거리게 한 그 죽음 이후에 유고 시집 '속죄양, 유다'(1993)가 나왔다.

이연주를 다시 읽는 것이 나는 늘 두려웠다. 그가 선택한 죽음의 격한 방식에 짓눌려서 만은 아니다. 그의 언어들은, 발화자의 얼굴에 대한 정보 없이도, 그 자체로 나를 진저리치게 했다.

그러나 이연주와 그의 몇몇 동료들(이들 가운데 최근까지 문자 활동이 가장 두드러진 이는 고인과 동갑내기인 김언희일 것이다)이 일궈낸 그로테스크 구역은 시인공화국에서 가장 자극적인 풍경을 품고 있다. 자신의 개인적 거리낌 때문에 공화국 방문객들에게 이 인상적인 구역을 숨겨놓는 길라잡이는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들을 것이다. 나는, 책임감으로 두려움을 억누르며, 십 수 년 만에 다시 '매음녀'를 펼친다.

생자(生者)의 것이든 망자의 것이든 사람의 신체가 존엄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흔히 영혼(이 아니라면 그저 ‘정신’이라고 해도 좋다)이라 불리는 고귀한 기(氣)의 거처라는 오랜 믿음이나 가정 때문이다. 그 곳에 영혼이 깃들여 있지 않(았)다면, 사람의 몸뚱이를 다른 숨 탄 것들의 몸뚱이와 다르게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들은 다 고깃덩어리다. 그 고깃덩어리가 푸줏간에 걸려있다면 가축의 것으로 추정되고, 병원 응급실이나 시체실에 놓여 있다면 사람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런데 생물학자들은 대체로 정신이나 영혼 같은 데 큰 관심이 없다. 그의 눈은 사람의 몸뚱이와 딴 동물의 몸뚱이를 ‘질적으로’구별하지 않는다. 그에게 사람이란 (다른 동물들처럼) 본질적으로 몸뚱어리의 존재이고, 정신이나 영혼이란 몸의 일부인 뇌신경의 자극-반응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생리학자 제럴드 에델만의 모호한 정의에 따르면, “물질조직의 어떤 특별한 형태들에 의존하는 특별한 유형의 과정, 다시 말해 두뇌의 형태학에 연결된 한 과정”(‘의식의 생물학’)일 뿐이다. 이런 인간관은 이미 과학자 사회의 확고한 지지를 얻었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지만, 거기서 고개를 돌리는 것은 부정직한 일이다. ‘매음녀’의 화자들은 무섭고 정직한 시선을 택했다. 그들은 인간의 몸을 푸줏간에 내걸어보기로 했다.

시집 ‘매음녀’의 화자들이 건네는 시선은, 그러니까, 생물학자의 시선이다. 여기서 생물학자는 생리학자, 외과의사, 간호사, 약리학자, 약제사, 병리학자, 산역꾼, 검시관 따위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순수하게 물질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병원이나 그 둘레에서 일한다. 그렇다면 ‘매음녀’의 상상력을 ‘병원의 상상력’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실상 이 시집의 많은 시들이 병원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매음녀’의 화자들은 흔히 (유사)약리학자다. 그들이 “주민들은 몰지각 발작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소./ 몇 그램의 몰핀과/ 몇 박스의 신경안정제를 부탁하는 바이오”(‘집행자는 편지를 읽을 시간이 없다’)라거나 “선진적 시민의식을 밀어주는/ 가나마이신이여”(‘가나마이신에게’), 또는 “난 걱정 없어요/ 고단위 비타민을 먹지요/ 빈혈약을, 모든 기관이 튼튼해지는 약을/ 병균에 감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매일 적당량의 항생제도 먹다마다요”(‘유한 부인의 걱정’)라고 말할 때, 이들에게 인간의 육신은 (화학)약(품)으로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일 뿐이다.

인간 육신의 대상성이 더욱 도드라지는 것은 시인의 외과적 해부학적 상상력이 발휘될 때다. 그리고 이 외과적 해부학적 상상력은 시집 ‘매음녀’의 육신 전체에 골고루 퍼져있는 세균과도 같다. 이 시집 어느 곳을 펼쳐도 “살아온 날과/ 살아갈 날이/ 뼈를 발라낸/ 도살당한 고깃덩어리와 씹한다”(‘유토피아는 없다’)거나 “방치된 탄생이 관 같은 요람 위에 누워 있다. 푸줏간의 비릿한 냄새”(‘신생아실 노트’), 또는 “거리마다 화농한 살덩어리/ 불그스름한 피고름이 질펀하오”(‘집행자는 편지를 읽을 시간이 없다’) 따위의 역한 진술이 지천이다.

이런 진술들은 흔히 부패의 상상력에 매개돼 있고, 더러 인간의 육체를 동물이나 식물의 그것들과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인체의, 차라리 인육의 별 볼 일 없음을 강조한다. 예컨대 “마침내 냉장고에서 야채들이 썩어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생선토막들이 줄줄 물을 흘리며 흐물텅 녹아가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후더분한 살 냄새가, 퀘퀘한 땀 냄새가 집안 곳곳에 배어가기 시작했다”(‘외로운 한 증상’) 같은 시행이 그렇다. 시집 표제의 바탕이 된 듯한 ‘매음녀’ 연작도 육체의 이런 비루함을 저잣거리에 표나게 전시해놓는다. 시집 ‘매음녀’에서 드문드문 묘사되?섹스는 아무런 낭만적 에로스도 유발하지 않는다. 섹스는, 그 곳에서, 그로테스크한 몸뚱어리들의 그로테스크한 결합일 뿐이다.

이 시집에 더러 나타나는 바람 이미지도 방랑이나 사랑의 유희, 변덕 같은 해묵은 낭만적 맥락에 놓여있지 않다. 그 바람은, “무딘 물방울의 세포들은 전염병을 몰고 오는 바람에 쏠려 공중분해되는 격전지에서 갈쿠리 같은 병균들 와글와글 떨어지는 것이었다”(‘집단무의식에 관한 한 보고서’)나 “바람이 심하게 부는구려./ 병균을 실어 나르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매체는 없지요”(‘집행자는 편지를 읽을 시간이 없다’)에서 보듯, 병균의 운반자일 뿐이다. 그 바람은 “광포한 바람”(‘집단무의식에 관한 한 보고서’)이거나, 고작 “질 나쁜 공기”(‘이십 세기 최고의 행위’)다. (특히 ‘이십 세기 최고의 행위’라는 시는 시인 자신의 마지막을 차갑게 내다본 듯한 몇 줄의 행으로 섬뜩하다.)

세상에 건네는 이런 침울한 시선에 자학이 곁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누구의 탓도 아닌, 방(房)’, ‘유배지의 겨울’ ‘담배 한 개비처럼’ ‘불행한 노트’ ‘잡초’ ‘밥통 같은 꿈’을 포함해 ‘매음녀’의 적지 않은 작품들이 자기 비하, 자기혐오의 언어로 을씨년스럽거니와, “간 절은 자반 고등어”를 화자로 내세운 ‘좌판에 누워’의 “창시 빠져나간 뱃가죽 좌판에 늘어붙어/ 식탁으로 가는/ 길, 기다리는” 같은 대목에도 시인의 변형된 좌절감이 스며있다.

시집 ‘매음녀’를 읽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 세계는 온전한 세계가 아니라 뭉개진 세계다. 묘한 것은 그 세계가 질펀하면서도 메마르다는 것이다. ‘매음녀’는 늪이자 사막이다. 그 곳은 “불그스름한 피고름”(‘집행자는 편지를 읽을 시간이 없다’)의 세계이자, “먼지를 뒤집어쓴 길들”(‘이십세기 최고의 행위’)의 세계다. 거기서, 육체는 부패하면서 풍화한다. 어느 쪽이든, 그 세계는 신선이나 청량과는 대척에 있다. 화자들은 거기서 신명 나는 사물놀이 대신에 ‘폐물놀이’를 하고 있다. ‘폐물놀이’라는 제목을 지닌 시에서 화자는 자신을 “버려진 시계나 고장난 라디오/ 헌 의자카바나 살대가 부러진 우산”에 투사한다.

무엇이 30대의 시인으로 하여금 세상을 이리 어둡게 보도록 만들었을까? 어쩌면 그 사연은 독자들이 알 수 없는 시인 개인사의 질곡에 있었을 수도 있다. 그의 한 화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삶이 흘러가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매음녀 4’)라고 푸념했듯, 시인의 삶이 원치 않은 방향으로 흘렀는지도 모른다. ‘풀어진 길’의 화자도, 이와 비슷하게, “어떤 사람들은 참으로 세상의 많은 것을 움직인다./ 나는 다만 한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기쁨조차 갖고 있지를 않으나--”라고 투덜댄다. 이 시의 첫 연은 “구급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해갔다./ 사이렌 소리가 공기 속으로 파고들었다./ 내 몸에서 어떤 핏톨들이 튀어올랐다./ 나는 음습한 구석으로 가서/ 담벼락을 향해 오줌줄기를 뿌리며/ 무지개, 무지개...... 그렇게 중얼거린다”로 시작하는 바, 이 대목의 위급함과 불길함, 심란함과 음습함은 시집 ‘매음녀’의, 더 나아가 이연주 시세계 전체의 시그널인 것만 같다.

그러나 섣부른 추리는 보기 흉한 추리다. 그 추리 너머에서, 이연주는 세계를 부패와 황량의 공간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제 시선을 인간 육체의 처절한 물질성에 집중시켰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세계를 향한 비관적 시선이 인육의 물질성에 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것인지, 인체의 차가운 물질성에 대한 직시가 비관적 세계 인식으로 이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이연주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것을 구태여 보여주었다. ‘매음녀’ 속에서, 인간의 몸은 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겨우겨우 견뎌내거나 버텨낸다. 슬프게도, 시인의 눈에 포착된 그 세계 속에서, 시인의 몸은 견딜 힘이 그리 크지 않았다.

고종석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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