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연방 대법관의 임용과 관련해 민주당 대 공화당, 진보 대 보수의 첨예한 정치 대결이 진행되었다. 진보적인 민주당은 대법원의 이념적 균형이 보수 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상원에서 필리버스터(의사 진행 방해) 계획을 짜는 등 격렬한 항전 태세를 보였다.
그러나 대세는 대법관 지명권을 가진 대통령이 속하고 상하 양원의 다수 의석을 차지한 보수적 공화당으로 기울었다. 작고한 렌퀴스트 대법원장의 후임으로 보수적인 로버츠 판사가 취임한데 이어, 은퇴를 선언한 오코너 대법관의 후임으로 역시 보수적인 얼리토 판사가 58대 42로 상원 인준을 통과해 공화당과 보수 진영의 기세가 등등하다.
●극심한 정파 대결의 전장화
미 대법관 임용을 둘러싼 정치 대결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9명에 불과한 대법관은 종신직이므로 새로 임용할 기회가 자주 오지 않고, 그만큼 한번 기회가 오면 정파 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된다.
1987년 너무 보수적 원칙주의자라는 이유로 상원에서 인준이 거부된 보크 판사의 예, 1991년 성희롱 논란을 일으키며 세간의 관심과 이념 논쟁을 촉발한 토마스 판사의 예, 부시 대통령이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보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보수 진영의 반대를 받아 지명이 철회된 마이어스의 예 등을 통해 미국 정치권이 대법관의 임용에 얼마나 예민한지 엿볼 수 있다.
사법부는 정치로부터 분리돼야 하고 초당파적 법 논리만 따라야 한다는 원칙에도 불구하고, 실제 미 사법부는 정치화될 수밖에 없다. 9명의 대법관이 어떤 생각을 하고 그들의 의견이 어떻게 다수 대 소수로 갈리는가에 따라 미국정치의 지형이 결정적으로 좌우되고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2000년 대선에서는 대법원의 결정으로 당선의 명암이 교차했다. 국민과 정치권의 압도적 지지로써 통과된 법도 법원의 위헌심사로 무효화시킬 수 있다. 또한 법원은 구체적으로 낙태, 총기 규제, 안락사, 공립학교에서의 기도, 여성과 소수인종을 위한 할당제 등 민감한 정책사안의 적법 여부를 결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정치적 영향력이 큰 미 대법원이 정치 대결에 휩쓸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근래 들어 그 정도가 특히 커진 것으로 보인다. 두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미국정치의 양극화, 즉 진보적 민주당 대 보수적 공화당의 이분법적 대결의 심화로 인해 정치권의 갈등이 극심해지고 교착에 빠지는 빈도가 늘어남에 따라 정책사안이 사법부에 의해 최종 판가름 나는 경우도 늘게 된 것이다.
둘째, 민간 차원에서 보수와 진보 양 세력이 사회적 동원에 성공하고 기존 정당과는 별도의 힘센 조직세력으로 자리잡게 됨에 따라 사법부를 자기 쪽으로 움직이려는 양측의 전략이 경쟁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리 사법부 위상에도 시사점
정치의 양극화와 이념세력의 조직화로 인해 미 대법원의 정치화가 가속되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정치도 정당 간의 이분법적 대결로 갈등의 극대화와 교착의 지속화를 겪고 있다. 또한 한국의 시민사회 영역에서 진보 측이 정치세력으로 조직화한 것에 대응해 보수 측도 조직세력화 과정을 거치며 광범한 이념 대결을 낳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서처럼 한국 사법부도 정파적ㆍ이념적 대립의 전장으로부터 벗어나 있기는 힘들다. 사법부의 판결과 위헌심사를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정치세력들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구성과 결정을 각기 유리한 쪽으로 이끌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어느 정도 사법부의 정치화는 어쩔 수 없다 치고 그 과정에서 어떤 근본적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지 지켜보는 것이 우리의 향후 과제라 하겠다.
임성호<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경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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