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는 생생하게 더러는 희미하게, 녹아도 녹지 않는 산하의 잔설처럼 또는 그것을 비추는 몇 가닥 햇살처럼 기억의 언덕바지에 남아있는 것이 어린 시절 추억이다.
구정에 고향을 찾는 것은 다름 아닌 자꾸만 멀어져가는, 달력에 붉은 글씨로 표시된, 잃어버린 시간과 추억을 찾는 것이요, 우리 사회 전체가 집단적으로 꿈을 꾸는 것이다. 그래서 고향 방문을 마치고 또다시 집으로 향하는 것은 현실로 복귀하는 것이요 꿈 또는 마취에서 깨는 기분과 다르지 않다.
명절의 고향 방문은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변함즉도 하건만 이어지는 도로마다 귀성 인파로 넘치는 것을 보면 고향에는 분명 사람들을 끊임없이 흥분시키고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있다.
비록 모두 떠나고 홀로 남아 초췌하게 늙어버린 고향일망정 부모와 조상들의 묘가 고스란히 거기에 있으니, 머지않아 지금 발 딛고 있는 세상의 저편에서 있을지도 모를 재회를 위해서라도 결코 무심할 수는 없는 곳이 고향인 것이다.
고향을 방문하거나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자들이 진정 보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우선적으로는 부모형제요 일가친척이겠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지난날의 자신의 모습일는지 모른다. 시간 속에 시들고 쇠잔해가는 저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결국 함께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훔쳐보고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명절의 고향 방문에는 만남의 기쁨과 더불어 다시 헤어지고 떠나야 하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실존들의 짙은 슬픔이 쪽빛 물감처럼 배어있다.
고향은 항상 남아있는 자와 떠난 자,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의 광장이자 정거장이다. 고향은 한 손으로는 오라고 손짓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잘 가라고 흔든다.
두 개의 깃발을 동시에 흔드는 기수이다. 그래서 도착한지 이틀이 못되어 다시 도망치듯 떠나는 것인가? 문득 자신의 그림자를 밟고 놀라지 않았다면, 어찌 그리 서둔단 말인가? 그때로부터 달아나고 싶지 않다면 어인 핑계인가?
아직 영원한 고향을 찾지 못한 나그네 인생들에게 이승에서의 고향집은 어쩌면 저 세상의 모델하우스 같은 것이 아닐는지? 늘 꿈속에서나 만나는 이들이 다시 모여 살 수 있는. 고향아 말해다오, 너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꿈꾸던 삶을 살았는가, 거울아, 거울아, 말없는 나의 고향아.
최병현<호남대 영문과 교수>호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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