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히 먼 옛날, 인류의 조상들에게 햇빛이 사라지는 밤은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 출몰하는 맹수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인간은 처음 번개나 산불 등으로 발생하는 자연의 불을 이용하기 시작했고, 그 불을 길들이면서 등(燈)을 만들어 사용해 왔다. 스위치만 켜면 전깃불을 얻는 것이 우리에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수십만 년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전깃불이라 할 수 있는 아크등이 사용된 것은 겨우 150여 년 전이다. 밝고 아름다운 빛을 만들려는 노력으로 오늘날 우리는 다양한 인공 광원들을 이용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물질은 아마도 ‘형광체’(螢光體)일 것이다.
형광체란 외부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빛(가시광선)으로 바꾸는 물질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가해지는 에너지는 자외선, 전자빔, 전기에너지, 열에너지 등 다양하다. 최초의 형광체는 1603년 이탈리아의 연금술사인 빈센티누스 카샤롤로(Vincentinus Casciarolo)에 의해 합성된 ‘태양석’으로, 햇빛 아래 두었다가 어두운 곳으로 옮겨 놓으면 빛을 발해 이와 같은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 태양석은 황산바륨(BaSO4)에 불순물이 포함되어 있던 물질로 추정된다.
오늘날 형광체는 일상생활에서, 특히 일반 조명 분야에서 너무나 자주 쓰이는 물질이 되었다. ‘형광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다. 깨진 형광등을 보면 몸체 유리의 내벽에 하얀 분말가루가 묻은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형광체이다. 형광등 내부에는 보통 아르곤(Ar)과 같은 기체와 수은이 함께 봉입돼 있다. 스위치를 켜면 형광등 내부 양쪽의 전극에 전압이 인가되면서 수은과 아르곤 가스가 전리되어 방전 플라즈마가 만들어진다. 플라즈마를 이루는 전자가 수은원자에 충돌하면 자외선이 방출된다. 자외선 자체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이 자외선이 형광체를 만나면 가시광선으로 바뀌어 어둠을 밝혀 주게 된다.
최근에 인기를 끌고 있는 발광다이오드(LED) 광원의 손전등도 빛을 만드는 과정에 형광체가 사용된다. 여기에는 반도체 칩에서 발산하는 청색빛을 백색광으로 바꾸어주는 황색형광체가 사용되고 있다.
디스플레이의 경우는 어떨까? 여기에도 형광체는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액정표시장치(LCD)의 발광원인 백라이트에는 주로 가느다란 형광등이 쓰인다. 평판 디스플레이의 또 다른 주자인 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PDP)은 빨강, 녹색, 파랑색 빛을 만들어 내기 위해 하나의 화소마다 세 개의 작은 방에 세 가지의 형광체를 각각 집어 넣는다.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형광체를 디스플레이에 이용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광범위한 사례다. 브라운관 화면을 구성하는 각 화소들은 빨강, 녹색, 파랑 빛을 발산할 수 있는 형광체들이 규칙적인 형태로 발려 있다. 브라운관 뒤쪽에 있는 전자총이 화면의 각 화소에 전자빔을 쏘아대면서 우리가 매일 보는 텔레비전의 아름다운 총천연색 화면이 만들어진다. CRT(cathode ray tube)라고도 하는 이 기술이 브라운관이라 불리게 된 이유는 1897년 브라운(Braun)이라는 사람에 의해 제안된 기술이기 때문이다.
더 아름답고 밝은 빛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오늘날 다양한 형광체 기술과 관련 산업을 탄생시켰다. 날로 발전해 가는 조명과 디스플레이 기술의 이면에는 이러한 빛의 연금술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고재현 한림대 전자물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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