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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를 넘어…아시아 문화 허브로] (9) 한국적 콘텐츠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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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를 넘어…아시아 문화 허브로] (9) 한국적 콘텐츠를 찾아라

입력
2006.02.01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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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06년. 전각에 둘러앉은 황태후와 황제 부부, 황태자 내외가 백련차를 마시며 다산 정약용 선생이 결혼 60주년을 맞아 쓴 한시를 번갈아 가며 읊는다. 이어 황태자와 황태자비는 궁궐 내에서 막대기로 공을 쳐 목표에 골인시키는 전통 놀이로 오늘날의 골프와 비슷한 ‘격방’(擊棒)을 즐긴다.

황태자비는 드레스 차림일 때도 비녀를 액세서리로, 댕기를 허리띠로 활용한다. 황태후는 양장을 입고 현대적으로 변형된 남바위(여성들의 전통 방한모)를 쓴 채 공식 석상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국산 최신형 MP3를 손에서 뗄 줄 모르는 황태자의 거실 벽면은 높게 쌓아놓은 책더미와 서재의 여러 가지 일상 용품을 그린 전통 그림인 ‘책가도’(冊架圖)를 디지털화한 인테리어 소품이 차지하고 있다.

MBC가 1월 11일부터 방송하고 있는 수목 드라마 ‘궁’ (극본 인은아 연출 황인뢰) 이야기다. 21세기에 한국이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황실이 존속한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이 드라마는 가장 진화한 ‘한류 콘텐츠’ 중 하나다. 한국 대중문화가 아시아를 휩쓸고 있는 비결로 많은 전문가와 일반인들이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운 만남’을 꼽고 있는 가운데 한국적 콘텐츠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는 ‘궁’은 이런 강점을 전략적으로 구사하고 있다.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는 한국 전통문화와 디지털 가전제품이 넘쳐나는 21세기 한국의 발전상을 사랑 이야기라는 보편적 감성과 더불어 보여주고 있는 것.

이를 위해 ‘궁’의 외주 제작사인 에이트픽스는 실내 세트에 15억 원을 투자했다. 또 2억 원이 들어간 황태자비의 의상을 포함해 화려한 전통 궁중 의상과 서양 의상과 전통 한복, 최신 패션 경향을 조사한 뒤 컴퓨터 합성 과정을 거쳐 준비한 수십 벌의 퓨전 의상도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궁’의 미술 총감독으로 영화 ‘혈의 누’ 미술을 담당했던 민언옥씨는 “우리나라에도 귀족적인 문화가 있고 그것이 상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며 “한국적인 콘텐츠를 세계적 보편성에 맞게 세련되게 재창조할 때 우리 문화 상품의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궁’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정작 경복궁을 비롯한 서울 시내 궁궐의 빼어난 풍광을 드라마에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2005년 7월 22일 개최된 문화재청 촬영심의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촬영 불가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궁릉 관리과의 한 관계자는 “외부 전문가 9명과 문화재청 소속 2명으로 구성된 심의위원회가 ‘드라마 성격이 문화재의 역사성에 전혀 맞지 않기 때문에 촬영을 허가할 수 없다’는 판정을 내렸다”며 “문화재를 훼손해 가면서까지 홍보를 할 필요성은 없지 않냐”고 말했다.

이는 2004년 9월 6일 경복궁 경회루 앞뜰에서 600명의 인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9회 국제검사협회(IAP) 전체 총회 공식 만찬과 대비된다. 당시 참석자들에게 흡연까지 허용해 특혜 시비가 일자 문화재청이 ‘한국 전통문화를 널리 소개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명한 사실에 비춰보면 ‘궁’의 촬영 불허는 문화 콘텐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척박한 인식 수준을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우리 문화 콘텐츠의 핵심 역량이 될 ‘한국적인 소재’를 찾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이 2002년부터 2007년까지 500억 원을 투입해 추진하고 있는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화’ 사업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화 사업은 동양 고전인 ‘산해경’부터 이순신 장군의 진법에 이르기까지 문화적 유산을 다양한 형태로 디지털화 하는 작업으로 지난 5년간의 작업을 통해 171건의 문화 원형이 발굴 됐다.

최근 8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왕의 남자’의 제작진은 촬영 과정에서 2002년 문화원형 사업 과제였던 ㈜엔포디의 ‘디지털 한양’의 도움을 얻었다. ‘디지털 한양’은 조선 후기 한양 도성의 복원을 통한 디지털 생활사 콘텐츠로 궁과 육조 등 239개의 도성 내 주요 건물과 장소들을 배치도와 이미지 맵, 3차원 모델로 복원한 프로젝트. ‘왕의 남자’ 제작진은 촬영 전 기획 단계부터 시나리오 작업과 화면 구상을 위해 ‘디지털 한양’의 경복궁 복원 3D 버추얼 세트를 통해 모의 촬영 시뮬레이션을 진행했다. 이 밖에도 MBC가 조선 시대 검안 기록을 바탕으로 한 프로그램인 ‘조선 과학 수사대 별순검’을 방송했고 인기 캐릭터 ‘뿌까’를 제작한 ㈜부즈의 경우 전통 설화인 ‘토끼와 거북이’ 등에서 스토리를 빌려온 캐릭터 ‘모엔가’를 준비는 등 문화 원형의 활용 사례가 점차 늘고 있다.

권기영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베이징 소장은 “현재 필요한 것은 콘텐츠가 계속 샘솟을 수 있도록 우물을 파주는 일”이라며 “‘문화원형사업’ 이외에도 한국 구비 문학의 스토리 뱅크화 등 장기적으로 한국적 콘텐츠 생산이 지속될 수 있는 기반 조성에 나설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한라대 문화콘텐츠학과 구문모 교수는 “우리 전통 문화뿐 아니라 현대적 생활 방식과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한국 고유의 특성을 찾아내고 해외 시장 조사를 통해서 어떤 우리의 특성이 해외에서 어필할 수 있는지를 분석하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

■ 온라인게임 개발 엔도어즈 김태곤 이사/ "우리 역사를 게임으로 알리죠"

온라인 게임 개발 회사인 엔도어즈의 김태곤(34) 개발 이사는 ‘한국적 콘텐츠’란 주제에 대해 그 누구보다 할 말이 많은 사람이다. 1995년 군에서 제대한 뒤 ‘충무공전’을 시작으로 ‘임진록’ ‘이스트’ ‘천년의 신화’ ‘거상’ ‘군주’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소재로 한 11개의 온라인 게임을 개발한 그는 그간의 작업에 대해 “어려웠다”고 했다.

“2차 세계 대전 때 2,000만 명의 희생자를 냈던 러시아도 전승 기념일 행사를 해요. 명의 도움이 있었지만 ‘임진왜란’도 우리가 승리한 전쟁이에요. 적들은 패퇴했고 우리는 새로운 무기와 영웅을 얻었죠. 그렇지만 그 누구도 그 자랑스러움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죠. 그런 우리 역사를 게임을 통해 알려보자는 책임 의식이 있었죠.”

그러나 한국에서 그것도 하루가 다르게 유행이 바뀌는 게임 업계에서 전통 문화를 상품으로 만든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들 우리 고유 문화 콘텐츠가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막상 아무도 그곳에 손을 대지 않아요. 임진왜란만 해도 관련된 소설이나 전문 서적이 부족해 시나리오를 만드는데 애를 먹었죠. 아마 일제 시대를 거치며 전통 문화를 고수하는 게 잘못이라는 ‘단절 의식’이 생긴 탓인 거 같아요. 이제라도 우리 전통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한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가야 해요.”

14년 동안 역사 게임을 만들어온 그는 자신의 작업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얻은 듯 보였다. “온라인 게임으로 문화적 장벽이 높은 미국과 유럽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서양 콘텐츠보다 더 서양스럽게 만드는 정공법을 취하든지 아니면 한국적 색채를 보편 타당하게 녹여낸 아시아적인 것이 필요합니다.” 그뿐이 아니다. “처음 제가 만든 게임을 보면 민족주의적 색채가 너무 강하다는 걸 느끼게 되요. 과거 우리 드라마나 영화처럼 일본인들을 침략자나 간사하게만 묘사할 게 아니라 상대로서 존중해주고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할 때죠.”

그는 최근 ‘스타크래프트’의 개발사인 블리자드코리아가 자사 게시판에 설을 중국식 이름인 ‘춘절’로 표기해 네티즌들의 강한 반발을 샀던 일에 대해서 ‘자성론’을 들고 나왔다. “슬프지만 엄연한 현실이에요. 개발사들을 탓할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한국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콘텐츠 키워드가 그만큼 없었고 우리 자신도 한국 전통 문화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자각해야죠. 최근 우리 문화 콘텐츠에 전통적 요소가 조금씩 녹아 들어가고 있는 건 고무적인 현상이에요. 블리자드의 실수도 따지고 보면 우리에 대한 관심 표명 아닐까요?”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임진왜란’을 게임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인식시켜 준 그는 여전히 삼국유사와 광개토대왕, 장보고 같은 우리 역사야말로 온라인 게임의 중요한 자산이라고 믿는 듯했다.

김대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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