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51)의 일곱 번째 시집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2000년, 이하 ‘달력 공장’)가 세 번째 천년의 들머리에 나온 것은 우연이겠지만, 그것은 맵시 있는 우연이다.
시집 표제로 내세운 시의 열쇠말이라 할 ‘달력’의 연도가 이 해에 우수리 없이 딱 떨어졌으니 말이다. 새로운 세기나 새로운 천년은 무차별적인 시간의 흐름에 인간이 자의적으로 새겨놓은 눈금에 지나지 않지만, 이런 인위적 눈금에 효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눈금은 우리들의 삶에 리듬을 부여하고, 그 삶을 성찰할 기회를 베푼다. 이런 눈금으로서, 세기의 전환기만 한 것은 흔치 않다. 거기선 꼭 채워진 숫자의 매력이 솟아 나오기 때문이다. 세기의 전환기가 천년대의 전환기와 포개져 있다면 더욱 더 그렇다.
표제시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의 화자는 밍밍하게 되풀이되는 삶의 진부함과 비루함을 참아내지 못한다. 달력이란, 그 달력으로 표상되는 시간과 그 시간 속의 삶이란, “열두 곡이 다 흐른 다음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음악과 다를 바 없음을 그는 이미 알아버렸다.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그 음악을 들은 탓에, 그는 “어느쯤에서 태양이 타오르고/ 어느쯤에서 장마가 시작되는지”도 다 외우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달력 공장 공장장에게 푸념한다. “왜, 이 윤전기 앞에선 한 번도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아요?/ 왜, 나는 매일 아침 새로운 형량을 시작해야 하나요?”
그러나 공장장은 화자의 항의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윤전기는 멈추는 법 없이 해마다 똑같은 달력을 찍어낼 것이고, 화자는 그 달력의 밋밋하고 억압적인 스케줄에 따라 컨베이어벨트 위의 삶을, 시시포스의 노역을 계속할 것이다. 달력 공장의 공장장은 누굴까? 근원적으로, 신(神)이나 섭리라는 이름의 무제약적 존재나 이법(理法)일 것이다. 그 신이나 이법은 천체의 운행을 주관함으로써 시간을 주무른다.
그리고 이 시의 화자는 시간 속에 갇혀 어찌할 바 모르는 제 몸뚱이를 서러워한다. 이 시집의 또 다른 화자들도 “시간이란 이름의 사냥개들은/ 방책 밖에서 으르렁거리고”(‘SPACE OPERA’)라거나, “윤회의 소용돌이에 끼여 오도 가도 못 하는 한 영혼”(‘메아리가 갔다가 오는 만큼, 그만큼’)이라는 말로 수인(囚人)의 처지를 한탄한다. 최승자의 ‘내 무덤, 푸르고’라는 시집 한 권을 통째로 적신 시간 속의 절망을 ‘달력 공장’의 김혜순도 더러 내비치고 있다.
표제시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를 사회학적으로 읽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를테면, 화자가 달력 속의 여성 모델들과 일본 대사관 앞의 (위안부) 할머니들과 일상의 노동에 치인 자신을 중첩ㆍ대조시킨 것은 노동ㆍ여성 사회학적 상상력에 이끌린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럴 경우에, 달력 공장의 공장장은 기존 체제를 지탱하는 세력이나 힘의 은유로 읽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가파른 읽기는, 저도 모르게 내던져진 인간 존재의 근원적 수동성을 직시하는 화자의 비극적 세계인식을 너무 좁혀놓거나 휘어놓는 일이 될 것이다.
달력 속의 여성 모델이나 소복 입은 위안부 할머니는, “어느 부분에선가 경건하게 완전 군장하시고/ 낚시질 떠나시는 우리 아버지/ 아버진 이제 정년 지나서 시장 바구니 들고 엄마 따라 다녀요”라는 시행의 (화자) 가족처럼, 달력의 특정 시기와 화자를 자동적으로 묶는 연상 목록이라 읽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기는 하나, 표제시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는 이렇게 해석의 지평을 확장시켰을 때 시집 ‘달력 공장’의 구성적 표본에 가까워진다. ‘달력 공장’에 묶인 작품들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가족을 등장시킨 시다. 이 시들 가운덴,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처럼 신화적 분위기에 휘감겨 있는 것이 많다.
둘째는 얼마쯤의 사회학적 상상력에 감염된 시다. 여성주의 맥락이 또렷이 읽히는 ‘또 하나의 타이타닉호’나 ‘물 속에 잠긴 TV’가 그 예다. 이 시집에 묶인 작품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세 번째 유형은 화자 개인의 고통과 절망이 토로되는 시다. 물론 이 분류는 매우 거칠고 도식적이다. 많은 경우, 이 유형들은 서로 스며들어 있어서 그것들을 또렷이 갈라내기는 어렵다.
어떤 유형에 속하든, ‘달력 공장’의 시들은 시공간적으로 광대무변하다.
‘애처로운 목탑’이라는 작품에서는 ‘천년 넘게’ ‘천년 내내’ ‘천년 전의 검은 활촉들’ ‘천년 묵은 목계단’ ‘천년 전쟁의 병사들’ ‘천년 묵은 몸’ 등 천년 세월이 되풀이 발설되고 있고, ‘유화(柳花)’는 그 제목이 가리키듯 상상력의 실마리를 고구려 건국 신화에서 끌어내고 있다. 공간적으로도 시인의 상상력은 몽골과 남아메리카를 거쳐 태양계의 변두리 명왕성에까지 이른다. 그 시공간은 확장하면서 수축한다.
‘SPACE OPERA’에서는 인체 속의 미시 세계와 우주 공간이 포개지고, ‘태양의 축제’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분위기)가 겹친다. 말하자면 ‘달력공장’의 세계는 자주 환상적이고 환각적이다. 그것은 더러 약물 사용자의 ‘하이(high)’ 상태를 연상시킨다. “내 머리채는 이제 마악 떠오르는/ 달에 휘익 빨려들었다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Spoonful Blues’) 같은 극초감각적 진술이 그 전형적 예다.
이런 몽환적 진술에서는 시인의, 더 정확히는 화자의 무기(巫氣) 같은 것이 읽힌다. 그러니까 ‘달력 공장’의 공간은 초현대적 샤머니즘의 세계다. “한 번도 녹아본 적이 없는 머나먼 눈 나라”에서 “시리디시린 얼음 비단 치마저고리 만들어 입고” 사는 “얼음아씨들”(이상 ‘얼음 비단, 얼음 아씨’)을 비롯해 이 시집에 얼음 이미지가 잦은 것도 그 무기의 뜨거움을, 신열을 식히려는 시인의 내밀한 욕망 탓이 아닐까?
물론 한 화자는 “이 우주의 너무나도 차갑거나/ 너무나도 뜨거웠던 온갖 행성들로부터 고통이 밀려온다”(‘명왕성에서 온 그녀’)며 뜨거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아파하지만, 대체로 ‘달력 공장’의 서정적 자아들은 얼음으로 제 신열을 식히는 뜨거운 존재다. 그들은 “낮이나 밤이나 살 속 깊숙이/ 얼음의 칼날을 꽂은 채 살아가”(‘성에 꽃다발’)야 하는 얼음아씨들이다. 속이 너무 뜨거운 얼음인간들이다.
두 주 전 신현림의 ‘해질녘에 아픈 사람’을 읽은 독자에게 김혜순의 ‘달력 공장’은 쉬이 읽히지 않는다. 온갖 감각들을 자유자재로 교차시키는 김혜순 특유의 섬세한 묘사가 시 읽기의 훈련을 미리 요구해서만은 아니다. ‘달력 공장’에는 너무 많은 풍경들과 사물들, 너무 많은 감상들과 증상들, 너무 많은 말들이 버무려져 있다.
신현림의 시가 따뜻한 멜로물이라면 김혜순의 시는 차가운 컬트물이다. 이 컬트를 구성하고 있는 강렬한, 검붉은 언어들은 형식적으로는 가지런하나 내용적으로는 어지럽다.
그것들은 알쏭달쏭하고, 밑도 끝도 없고, 지극히 사적이고, 산만하고, 시끄럽고, 잡다하다. 그것들이 그려내는 “피를 뚝뚝 흘리는 밤의 풍경”(‘풍경 중독자’) 속에선, 병적이리만큼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그러나 그 만큼이나 또 기가 센 화자들의 신음과 한탄과 비명과 짜증과 울음이 쉼 없이 울려 퍼진다. 김혜순의 언어들은 화자가 얼마나 아픈지는 친절히 알려주지만, 왜 아픈지는 좀처럼 알려주지 않는다.
화자들은 왜 아플까? 여성이어서? 그런 것 같진 않다. 김혜순은 여성주의 라벨을 제 몸에 붙이고 있는 시인이지만, 이 시집은 극히 부분적으로만, 그리고 표피적으로만 여성주의적이다. 그들에게 무기가 있어서? 글쎄. 늘 아프기만 하다면 무당 노릇을 어떻게 하겠는가? 화자의 (영혼의) 살갗에 통점(痛點)이 너무 많아서? 하나마나한 대답처럼 보이긴 하지만, 사실 이게 제일 그럴 듯하다.
위에서 한 행을 인용한 ‘풍경중독자’라는 작품은 시집 ‘달력 공장’의 핵심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이 시의 화자는 스스로 묻는다. “왜 풍경은 몸 속으로 들어와 고통이 되고 싶은 걸까?” 그 말투는, 종일 두통 복통과 인후 카타르에 시달리다가도 땅거미가 내리면 주점을 찾아 줄담배를 안주 삼아 술을 마셔대는 알코올-니코틴 중독자의 말투를 닮았다. 그러니까 이 질문의 답은, 시의 제목대로, 화자가 풍경중독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 묻는다. “왜 고통이 몸밖으로 나가면/ 한낱 고물 집하장이 되어버리는 걸까?” 그것은 풍경(이 야기하는 고통)의 재현이, 그러니까 언어를 통한 세계의 미적 감각적 재현이 그만큼 만만찮은 일이라는 뜻일 것이다.
물론 이 시행은 겸손의 맥락에서 발설된 것이겠으나, 김혜순처럼 말의 기교가 넉넉한 시인에게도 언어가 고물집하장이 되는 것을 막는 일이 늘 순조롭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이 질문은 시 속에서 답변되지 않았지만, 가능한 답 가운데 하나는 시인의 지나친 다변 욕구가 아닐까?
▲ 잘 익은 사과
백 마리 여치가 한꺼번에 우는 소리
내 자전거 바퀴가 치르르치르르 도는 소리
보랏빛 가을 찬바람이 정미소에 실려온 나락들처럼
바퀴살 아래에서 자꾸만 빻아지는 소리
처녀 엄마의 눈물만 받아먹고 살다가
유모차에 실려 먼 나라로 입양 가는
아가의 뺨보다 더 차가운 한 송이 구름이
하늘에서 내려와 내 손등을 덮어주고 가네요
그 작은 구름에게선 천 년 동안 아직도
아가인 그 사람의 냄새가 나네요
내 자전거 바퀴는 골목의 모퉁이를 만날 때마다
둥글게 둥글게 길을 깎아내고 있어요
그럴 때마다 나 돌아온 고향 마을만큼
큰 사과가 소리없이 깎이고 있네요
구멍가게 노망든 할머니가 평상에 앉아
그렇게 큰 사과를 숟가락으로 파내서
잇몸으로 오물오물 잘도 잡수시네요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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