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트의 대부’ ‘20세기의 르네상스 예술가’ ‘뉴 미디어의 오디세이’…. 백남준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들이다. 그의 예술세계를 한 마디로 요약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무한대의 상상력과 전방위적인 시각으로 현대예술의 최전선을 차지한 거대한 용광로이기 때문이다. 현대예술의 기법인 몽타주, 콜라주, 우연성과 고도의 테크닉 뿐 아니라 현대과학의 성과인 사진, 영화, 비디오, TV와 컴퓨터 기술까지 몽땅 자신의 예술에 녹여넣었다.
그의 예술세계가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84년 전 세계에 생중계된 위성 TV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서다. 그 전까지는 해괴한 짓을 일삼는 전위예술가 정도로 알려졌다. “예술은 사기”이며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던 그 자신의 말대로, 대중은 그가 해온 작업에 어리둥절하거나 어려워했다. 하지만 그가 개척한 비디오 예술은 오늘날 미디어 아트로 만개해 예술 지형에서 강력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새로운 매체로서 TV의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1963년 독일 부퍼탈에서 연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TV’를 통해 비디오 아트를 세상에 처음 선보였다. 문자, 소리, 이미지 등 전통적 매체를 총동원해서 전자 기술과 결합한 이 전시는 조형예술의 신대륙 발견을 알리는 기념비적 사건으로 남았다.
백남준 예술의 핵심은 메시지의 ‘소통’,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상응’이다.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예술과 기술,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그의 작품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1986년 TV 위성 쇼 ‘바이 바이 키플링’은 ‘동양과 서양은 영원히 만나지 못할 것’이라던 키플링의 말을 맞받아친 예술적 선언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콜라주 기법이 유화물감을 대신했듯이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신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예언대로 TV는 더 이상 바보상자가 아니라 예술적 매체가 되었다. 이는 단순한 표현 수단의 확장이 아니라 기존의 예술적 관행에 대한 반란이자 세계를 바라보고 표현하는 방식의 혁명이다.
백남준은 20세기의 중요한 음악가이기도 하다. 비디오 아티스트로 알려지기 전에 독일에서 작곡을 전공했고, 쇤베르크와 슈톡하우젠 등의 현대음악에 빠졌다. 그의 생애와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도 미국의 아방가르드 음악가인 존 케이지다. 소음과 침묵을 모두 음악적 소리로 사용했던 케이지의 ‘우연성 음악’은 백남준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모든 작품에는 음악이 영상과 더불어 두 기둥을 이룬다. 그의 강의를 들으려는 학생들은 반드시 대위법과 화성학을 알아야 했다. 이처럼 빛(비디오 영상)과 소리(음악)를 융합한 그의 작품 세계는 미술가들뿐 아니라 음악가들에게도 영감과 자극의 원천이 되고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종종 당황스러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그의 예술세계는, 기존 예술의 어법을 무너뜨린 반(反) 예술이면서 관객과 소통하려는 참여예술이며, 더 나아가 관객과 혼연일체를 이루는 한 바탕 굿이다. 그는 무당 중에도 큰 무당이었다.
오미환 기자 mhoh@hk.co.kr
■ 백남준, 시대를 앞서간 '문화 테러리스트'
그는 희대의 ‘문화 테러리스트’였다. 그의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세계 예술계는 경악했다. 그는 시대를 앞질러 문화의 새 장르를 열었고, 새로운 문화 정신을 구현했다.
그는 홍콩 로덴스쿨을 졸업하고 50년대 일본으로 건너가 미학과 음악사, 미술사를 전공(도쿄대)했으며, 56년 독일로 건너가서는 음악사를 공부했고(뮌헨 루드비히막시밀리안대), 전자음악에도 심취했다. 이 다양한 예술적 편력은 훗날 그의 풍성한 예술적 변주로 구현된다. 그는 문화 건달그룹으로도 불리는 전위그룹 ‘플럭서스’(Fluxus)의 일원으로, 60년대부터 테이프레코더와 피아노 공연, 뮤직일렉트로닉TV전 등 수많은 공연과 전시회를 가졌다. 60년 그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발표하면서 무대 아래로 뛰어내려가 넥타이를 자르는 등 파격적인 행위예술을 펼치며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플럭서스’는 그의 예술적 모태였다. 그는 그곳을 통해 당대의 도드라진 예술가들과 예술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교유했다. 플럭서스의 창시자이자 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미국 건축가 조지 마치우나스, 그의 정신적 쌍둥이로 일컬어지는 전위미술가 요제프 보이스, 음악과 소음, 삶과 예술의 구분을 배척했던 쇤베르크의 제자 존 케이지 등. 그에게 이들은 영혼의 동반자였고, 예술적 혈연이었다.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 등에서 활동하며 극단의 실험적 음악운동을 이끈 무어만은 백남준의 성공적인 뉴욕 상륙을 도왔으며, 64년부터 10년간 구미 각국을 돌며 그 유명한 반나의 콤비 공연을 벌인 파트너였다. 그리고 이들은 존 케이지(92년 사망)를 마지막으로 모두 백남준의 곁을 떠났다.
물론 백남준의 말년은 예술적으로 푸근했다. 그에게는 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받은 ‘황금사자상’이며, 96년 독일 ‘포쿠스’지 선정 ‘올해의 100대 예술가’, 97년 독일의 경제월간지 ‘캐피탈’이 선정한 ‘세계의 작가 100인’을 비롯한 숱한 메달과 훈장들이 주어졌다. 하지만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96년 3월 뇌줄중으로 쓰러진 뒤 왼쪽 신경이 마비된 몸으로, 끊임없이 창작활동에 매달리며 97년 스위스 바젤국제아트페어를 비롯한 굴지의 행사에 기를 쓰고 참가한 것도 그 고독의 공백을 예술로 메우기 위해서 였는지 모른다. 그는 예술을 통해서만 그들과 하나일 수 있었고, 그 방식대로 세상과 대면했다. 백남준의 빛나는 예술 혼과 작품들은 그렇게 우리와의 새로운 교유를 위해 남겨져 있다.
조윤정 기자 yjcho@hk.co.kr
■ 백남준 연대별 작품세계
“예술이란 게 반은 사기(詐欺)”라고, “사기 중에서도 고등 사기”라던 고 백남준씨. 그 당당한 호언의 바탕에는 평가에 주눅들지 않는 ‘신념’이 있었고, 그래서 금세기의 인류는 그의 ‘사기’에 열광했다. “난 원래 어리광쟁이로 자라서 그저 그 때 하고픈 일을 그냥 해요. 그러면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됩니다. 그 ‘이것’ ‘저것’의 흐름을 대표작을 통해 살펴본다.
조정된 피아노(1958~1963)
퍼포먼스에 사용했던 가시 철사와 사진, 브레지어, 깨진 달걀 등 온갖 잡동사니로 피아노를 장식(?)했다. 음악과 삶이 한 몸으로 얽힘을 표상한 것일까. 그의 친구 요셉 보이스가 도끼로 전시중인 피아노 가운데 하나를 부숴버려 더욱 유명해진 작품이다. 그가 부순 것은 피아노였을까, 음악 또는 삶이었을까.
길에 끌리는 바이올린(1961)
제1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한 백남준씨. 그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바이올린을 묶은 끈을 뒷짐지듯 쥔 채 질질 끌고가는 퍼포먼스로 세계를 경악시켰다. 전위의 정신으로 무장한 이 동양의 ‘문화 테러리스트’가 끈에 묶은 것은 ‘기성의 문화’였고, 그가 동네 개처럼 끌고 다닌 것은 ‘박제된 권위’였을지 모른다.
TV부처(1974)
한 평면에 부처와 TV수신기가 고요히 대면하고 앉아 있다. TV 뒤에 폐쇄회로 카메라가 묵묵히 이들을 응시한다. 이 작품이 품고 있는 의미 역시, 그의 대다수 작품들이 그런 것처럼, 무한히 열려 있다. 전통의 정신세계와 물질 문명의 총아가 벌이는 한 판 눈(眼)싸움이라 해도 좋고, 동서양의 조용한 공존을 떠올려도 좋다.
세기말(1989)
200여 대의 모니터와 TV수상기가 대형 점보트론과 조화하고 있다. 사뭇 질서 정연해 보이는 구성적 조화에도 불구하고 오른 쪽 아래 거대한 인간의 표정은 그다지 평화로워보이지 않는다. 이성적 외형적 세계의 정연함이 세기말 인간의 내면에 저런 불안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표현한 것인지 모른다.
시스틴성당(1993)
프로젝터들을 불규칙적으로 쌓아올렸다. 저 색채의 빛 속에서 무용수들이 절정의 공연들을 펼쳤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다만 그 색색의 빛들만이 천장과 벽을 장식하며 찬란한 시각적 공간을 연출한다. 그것이 그 빛 속의 과거와 어우러지며 묘한 환상을 자극하기도 한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의 만남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 백남준씨 어록 "원래 예술이란 게 반이 사기"
▦ “넥타이는 맬 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으며, 피아노는 연주 뿐만 아니라 두들겨 부술 수도 있다”-1962년 관객의 넥타이를 자르고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연출하며
▦ “왜 섹스는 미술과 문학의 지배적인 테마이면서 오직 음악에서만 금지되어 있는가”-1967년, 샬롯 무어맨과의 듀오공연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기획에 대해 말하며
▦ “원래 예술이란 게 반이 사기입니다. 속이고 속는 거지요. 사기 중에서도 고등사기입니다. 대중을 얼떨떨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이거든요”-1984년, TV물 ‘굿모닝 미스터 오웰’ 성공 직후 귀국 인터뷰에서
▦ “한국에 비빔밥 정신이 있는 한 멀티미디어 시대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1994년, 미술비평가 김홍희씨와의 대담에서
▦ “예술가는 좀 게을러야 해. 그래야 이것저것 궁리할 시간이 많지”-1995년, 호암예술상 수상 인터뷰에서
▦ “나는 한국인의 가능성과 생명력을 남대문, 동대문 시장에서 찾는다. 세계 경제의 경쟁력은 유통과 자유시장 기능인데, 남대문, 동대문 시장은 이 문제를 100년 전에 이미 해결해 놓았다”-1999년, 국내 언론과의 기자회견에서
▦ “한국에 돌아가는 것이 소원이며 한국에 묻히고 싶다”-2004년 10월, 뉴욕 맨해튼 백남준 스튜디오 신작 발표 기자회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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