뻐꾸기는 언제 어디서나 뻐꾹 뻐꾹 하고 우는 게 아니라 빠꿍 빠꿍 하고 우는 것도 있다는 게 최근 뉴질랜드 과학자들이 밝혀낸 연구결과입니다. 30년 동안 연구를 해 보니 종류가 같은 새도 사람이 사투리를 쓰듯 지역에 따라 울음소리가 서로 다르며, 시대에 따라 그 소리가 변하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새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어떤 소리는 반복하거나 빼먹는 실수를 하며, 상황에 맞지 않는 다른 신호를 쓰는 경우까지 있었다니 재미있는 일입니다.
계명을 먼저 배우는 음악공부
새의 울음은 그 자체로 언어이면서 노래이지만, 인간은 새와 달리 저절로 노래를 할 수는 없습니다. 학습을 통해 일정한 부호(符號)를 배우고 알아야만 그 노래를 후대에 물려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명(階名)을 먼저 배웁니다. 다른 음과의 높낮이 차이는 물론, 절대음감을 알려면 가사보다 계명을 먼저 익혀야 합니다. 궁상각치우, 오음(五音)으로 돼 있던 전통 음체계가 서양음악의 도레미파솔라시도에 밀려난 이후 음악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냥 음악이라고 불리던 우리나라의 소리는 서양음악에 치여 국악이라는 이름을 얻게 됐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중요한 것은 가사보다 계명입니다. 라미레도시라미라솔시미 라미레도시라미라솔시미 라미레도시미라도시미시 라미레도시미라도시미시 라시도레미레도시라미라. 이것은 슈베르트의 ‘노악사’입니다. 계명만 읊어도 슈베르트의 슬픔을 느낄 수 있는 노래입니다. “나의 작품은 음악에 대한 이해와 슬픔의 표현이다. 슬픔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만이 사람들을 가장 즐겁게 해 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슬픔은 이해를 날카롭게 해 주고 정신을 굳세게 해 준다”고 했던 슈베르트의 작품은 대부분 하나의 울음덩어리와 같습니다. 단순한 듯한 선율 속에 해소되지 않는 슈베르트의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슬픔의 소산이든, 흥겨운 악흥의 갑작스런 산물이든 어쨌든 음악은 소중한 것이며 조화의 힘을 통해 듣는 사람의 마음을 정화시켜 주는 대단한 작용을 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게 음의 희롱이라고 말했던 쇼펜하우어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모든 예술의 완성형이 음악이라는 그의 말은 흥어시(興於詩) 입어예(立於禮) 성어악(成於樂), 이른바 시로 일어나 예로 서고 음악으로 완성된다는 공자의 말씀과 상통하는 내용입니다.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은 모차르트의 생일이 바로 어제였습니다. 모차르트는 요절했지만 이미 음악 속에서 완성되어 죽은 천재였습니다. 국내의 한 클래식방송은 27일부터 31일까지 무려 83시간이 넘는 모차르트 특집방송을 내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일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지구인들이 우주인에게 무엇인가 메시지를 보내려면 누구의 음악이 좋겠는가? 이 질문에 대해 어느 음악평론가는 바흐와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투쟁과 극복의 음악이라 할 수 있는 베토벤이나 말러보다는 바흐와 모차르트가 보여 준 조화와 원융(圓融)의 세계, 이것이 인간과 우주의 교감을 가능하게 해 주는 하모니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설날에 생각하는 조화·원융
음악은 자유로운 영혼의 힘과 관용을 길러주고 편견과 아집을 버릴 수 있게 해 줍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은 저마다 하나의 음표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명만으로 따져 보면 어떤 사람의 표정은 언제나 도레미, 그리고 어떤 사람의 음조는 변함없이 라시도라는 식으로 특징지울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이와 같이 자유롭고 개별적인 특징과 창의성을 조화시켜 사회가 발전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문화행정과 정치의 몫일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 “우리들은 다 같이 화음공부 해보자”하는 화음3형제 노래를 부르면서 음악을 배웠습니다. 설날연휴는 저마다 자신의 원초적 계명을 재발견하고, 새로운 발전과 조화의 계명을 생각하는 기간일 수 있습니다. 이 연휴에 찾아가서 만나는 사투리부터가 하나의 음악이자 예술입니다. 민족의 큰 명절 설날연휴를 맞아 음악의 의미와 이 사회에서 음악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임철순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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