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피 투게더’의 한 배우는 녹음기에 슬픔을 담아 ‘세상의 끝’에 가서 풀어놓는다. 슬픔과 절망의 끝을 보겠다는, 기어이 새 희망을 보겠다는 것이다. 그 슬픔들은 과연, 주인을 찾아 되돌아올 길을 잃고 그 황량한 대륙의 끝 바닷가에서 방황하고 있을까? 그래서 그 불행의 노예들은, 마침내, 행복했을까?
2001년 등단한 시인 안현미(34)씨의 시 ‘해피 투게더’의 화자는 그 반편스러운 질문을 이렇게 무안하게 만든다. “해피?/ 투게더?//(…)/ 내 영혼의 울림통은 매일매일 들이닥치는 불행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녹음했지만 세상 끝에는 가고싶지 않았다 나의 매일매일은 언제나/ 세상 끝에서 시작되었으므로/ 나는 오래도록 불행과 함께 행복했다 하하 해피 투게더!”(‘해피 투게더’ 부분)
불행을 희롱하면서 행복을 가장(假裝)해보지만 그 가장에 늘 성공하지는 못하는 화자들이 토해놓는, ‘불온한 울음’같고 ‘거짓말’같은 노래와 하소연들로 시인의 첫 시집 ‘곰곰’(랜덤하우스중앙, 6,000원)은 채워져 있다.
표제작의 화자는 단군신화의 웅녀에게 퉁을 놓는다.
“백 일 동안 아린 마늘만 먹을 때/ 여자를 꿈꾸며 행복하기는 했니?// 그런데 넌 여자로 태어나 마늘 아닌 걸/ 먹어본 적이 있기는 있니?”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시의 제목이 ‘곰곰’이지만 이 시집 속 화자들의 고통은 성(性)의 질곡과는 거의 무관해보인다. 오히려 유년의 가난과 결핍에 연유한 ‘고장 난 생’(‘종이 피아노’)에의 운명적 절망감, 세상 속 삶의 비루함을 깨닫는 데 바쳐야 했던 ‘꽃다운 청춘’(‘거짓말을 타전하다’)의 비애…. 세상은 장바구니 주부에게 “간드러지게 꺾이는 트로트에 맞춰 비듬 낀 일상을 털어버리”라고 유혹하는 ‘(몸)부림나이트’ 같고, 네온사인으로 휘갑한 남산 케이블카 아래 쪽방촌 골목에서 술병을 쥔 채 얼어죽은 ‘빨간 코 루돌프’(노숙자)의 영혼이 떠도는 ‘검은 안개’의 도시일 뿐이다.
그러니 시는 더 이상 노래가 아니다. 여자들이 팔려 가버린 뒤 남은 집창촌의 텅빈 방.
“슬픔은 팡이팡이 피어오르는 곰팡이꽃처럼 습관적으로 습한 곳만 더듬거렸다”며 경쾌한 파열(‘ㅍ’)의 연쇄로 리듬을 만들어도 그 노래는 “팔리지 않는 위독한 모국어”(‘그 해 여름’)일 뿐이다.
“한 순간도 비루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고 “내일 당도할 오늘도 비굴하고 비굴”해야 하는 ‘나’에게 시인이란 한낱 “거짓말을 제조하”고 “거짓말을 타전하”는 자다.
그래서 “나의 시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물병 속의 물이 달콤해지기를 기원하는 주문”(‘열려라 참깨!’)이라고 할 때의 그 절박한 희망은 차라리 애닯다.
그 마법의 주문이 비루한 일상과 찬란한 유토피아를 잇는 “시간의 띠와 공간의 일그러짐”(‘짜가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 될 것인가.
마법의 꿈은, “하시시 웃고…하시시 울고…하시시 바람이 부는”(‘하시시’) 환각과, “내 속에는 내가 너무도 많아 분열을 앓고 있는 나는 나를 사랑한 당신을 사랑한 나를 증오”(‘옥탑방’)하는 분열로, 또 시간을 싹둑 오려버리거나 열차를 환승하듯 시간을 바꿔 타는 몽상 속으로 방황하기도 한다.
하여 화자는, 비행기를 타고 “지도엔 없는” 안개 마을로 오라고, 안개광장 너머의 카페 ‘세상끝 등대’에서 안개차(茶) 한 잔 마시자고 유혹한다.
“삶이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 꾸는 한 장의 꿈이라면/ 안개를 달인 한 잔의 차가 삶이기도 하죠”(‘카만카차’) 이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기 전에 알아둘 일이 있다. 돌아올 비행기는 “짙은 안개 때문에” 끝내 뜨지 않을지 모른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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