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바퀴야, 더 빨리!”
송재근 남자대표팀 코치의 칼날 같은 호통이 떨어지자 새벽 바람을 가르며 빙상을 지치는 쇼트트랙 태극전사의 스케이트 소리가 더욱 빨라진다. “슥~삭 슥삭 삭삭삭.” 수은주가 영하 6도까지 내려간 27일 오전 6시. 한국 엘리트 체육의 메카인 태릉선수촌을 감싸안고 있는 불암산은 어둠에 묻혀 여전히 잠에 취해 있었지만 산자락 끝에 있는 실내 빙상장은 날카로운 스케이트가 얼음을 지치는 소리로 가득찼다.
“좋아, 1분간 휴식.” 질주를 마친 선수들이 하얀 입김과 함께 거친 호흡을 쏟아낸다. 얼얼해진 두 손을 호호 불던 기대주 변천사(19ㆍ신목고)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여자부 금메달 ‘0’순위인 진선유(18ㆍ광문고)는 남자선수와의 레이스가 힘들지 않다는 듯 씩 웃었다.
이탈리아에서 개최되는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개막(2월10일)이 13일 앞으로 다가왔다. 쇼트트랙은 1992년 알베르빌 올림픽 이후 한국에 무려 11개의 금메달을 안겨준 효자 종목. 한국은 토리노에서도 남자 안현수(21ㆍ한국체대), 여자 진선유를 앞세워 쇼트트랙 종목에 걸린 8개의 금메달 가운데 최소한 3개를 차지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출발!” 송재근 코치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진선유가 쏜살같이 튀어나간다. 코너를 돌자 스케이트 날에 갈린 얼음 가루가 허공에 흩날린다. 111.12m의 트랙을 8.8초에 주파하는 모습을 보니 현기증이 날 정도다. 진선유는 남자대표팀 오세종(24ㆍ동두천시청) 송석우(23ㆍ전북도청)에 앞서 가장 먼저 결승점을 통과했다.
진선유는 송 코치가 꼽은 가장 확실한 금메달 후보. 송 코치는 “선유는 여자선수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피드를 지녔다. 중국의 왕멩이 라이벌이지만 레이스 도중 넘어진다거나 실격 당하지만 않으면 금메달이 확실하다”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였다.
시계가 오전 7시를 가리키자 박세우 여자 대표팀 코치의 인솔 아래 안현수와 최은경(22ㆍ한국체대) 등이 실내 빙상장에 도착했다. ‘파벌 싸움’이라는 불미스러운 사태가 진정되지 않아 대표팀이 둘로 갈라지긴 했지만 금메달이 유력한 계주 연습을 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양쪽 선수들은 서로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무한질주에 들어갔다. 스케이트 속도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박 코치의 호통이 쏟아진다.
“정신차려, 이제부터 시작이야.” 땀에 흠뻑 젖은 선수들의 호흡이 가빠진다. “더 세게 밀어! 자, 마지막 한 바퀴.” 젖 먹던 힘까지 쏟아부으며 트랙을 돌던 마지막 주자 안현수와 여자 강윤미(18ㆍ과천고)가 결승선을 통과하자 박세우 코치는 비로소 “좋아, 수고했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새벽 훈련을 마친 안현수는 “2002년 올림픽에서는 아쉬움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꼭 금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오겠다. 라이벌 안톤 오노(미국)를 이길 비책도 있다”며 이마에 맺힌 굵은 땀방울을 훔쳤다.
선수들이 아침식사를 위해 스케이트를 메고 빙상장을 나선 것은 오전 8시. 그때서야 기지개를 켠 태양이 불암산 정상 너머로 금메달처럼 노란 얼굴을 내밀었다. 아침 햇살에 얼굴이 노랗게 물든 태극전사들의 가슴에 금메달을 향한 야망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상준 기자 j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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