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가 젊은이들과 여성들을 매료시키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갑을 열 수 있는 상류층을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어요.”
중국 베이징시 관광국 부국장을 지낸 황전하이(黃振海)씨의 지적이다. 요즘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이 쓴 자서전 ‘강철 제1인’을 읽고 있는 그는 “한국 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았지만 최인호씨의 소설 ‘상도’를 읽고 부드럽지만 강한 한국식 경영에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상하이에서 가장 큰 서점인 스칭(書城). 총 5층 규모인 이곳의 2층에는 최근 ‘한류문학’ 서가가 등장했다. 인터넷 작가인 귀여니의 ‘그놈은 멋있었다’를 필두로 70여 종의 한국 하이틴 로맨스 소설이 진열되어 있다.
이는 김동리의 ‘을화’, 이문열의 ‘시인’,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등 한국 순수 소설이 불과 10여 종 밖에 번역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과 극명하게 비교된다.
대학교 졸업생인 루따웨이(路大偉ㆍ22)씨는 “한국 인터넷 소설은 재미있어 많이 봤지만 본격 문학 작품은 읽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철저하게 대중문화 부분에만 국한돼 문학과 공연예술, 고급 음식과 패션에 이르는 고급문화의 전파로 이어지고 있지 못하고 있는 ‘한류’의 현주소다.
이 중에서도 서사 예술의 근간이 되는 문학은 그 필요성이 가장 절실한 상황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등 일본 작가들이 한국과 중국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지만 한국의 본격 문학 작품은 아시아에서 인기가 별로 없다. 번역된 종수도 소수에 그치고 있다.
2001년 출범한 한국문학번역원이 한해 지원 받고 있는 돈은 25억 원에 그치고 있다. 2006년 개정된 문화진흥법에 따라 한국문학번역원이 법적 지위를 확보하게 됨에 따라 10억 원가량 예산이 늘어났지만 일본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내기 위해 기울인 노력과 예산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김윤진 한국문학번역원 사업2팀 팀장은 “한국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일본, 중국 작품들은 우리나라에 직수입됐다기보다는 세계적으로 검증을 받은 뒤 들어온 경우가 많다”며 “한국 문학도 이런 루트를 통해 전파되기 위해서는 더욱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드라마 ‘대장금’으로 그 진가를 알리고 있는 한국 음식의 경우도 정책의 부재로 세계화의 한계에 봉착해 있다. 일본은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국제 행사인 1964년 도쿄 올림픽을 통해 데리야끼(철판구이)를 세계화시키는데 성공했다.
또 스시(초밥), 사시미(생선회)가 서구 사회에서 고급 음식의 대명사로 통하게 되면서 기꼬망(Kikoman) 간장이 세계적인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태국도 적극적이다. 태국 정부는 2001년 ‘글로벌 타이 레스토랑’(Global Thai Restaurant)프로젝트를 마련, 미국 1,000여 개 지역에 태국 음식 전문점 3,000여 개를 개설하는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태국 정부는 이 계획을 통해 연간 20억 달러 이상의 이익이 발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각 음식점이 사용하는 식재료와 조리 기구의 70% 이상을 태국에서 수입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 정부는 한국 음식의 세계화에 대한 종합적 정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윤숙자 한국전통음식 연구소장은 “한국 음식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음식 조리법의 표준화와 세계적 식문화 기준에 맞는 코스 요리 개발 등의 과제가 산적해 있다”고 지적했다.
음식과 더불어 한 나라의 고급문화를 가장 손쉽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패션 분야의 세계화도 시급하다. 일본은 기모노를 비롯한 전통 의상에서 영감을 얻었고, 이를 현대화하는 작업으로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는 이세이 미야케와 레이가와쿠보 등의 디자이너 군이 존재한다.
프랑스 여성 잡지 ‘엘르’ 미국판이 2005년 11월호에서 한복을 ‘코리안 기모노’로 소개했다가 재미 동포의 지적을 받아 정정한 해프닝은 이 같은 위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베이징 한국문화원의 유재기 참사관은 “현재 한류는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의 문화 의식을 뒤집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며 “웅숭깊은 우리의 전통·고급 문화를 알리는 기회로 한류를 활용하려는 노력이 절실하다”고 주장했다.
김대성 기자 lovelily@hk.co.kr
■ 中에 한정식 집 낸 조태권 회장
“대기업들이 앞 다퉈 외국 프렌차이즈 식당 사업에 뛰어들면서도 한국 전통음식 산업은 무시하고 있어요. 정부는 요식업의 세계시장 진출에 대한 장기 전략 수립이 왜 필요한지 인식조차 못 한 상황이에요.”
전통 도자기 생산업체인 ‘광주요’의 조태권 회장은 대표적인 ‘한국 전통음식 산업론자’다. “한국 음식을 세계화하는 작업으로 수십조 원의 국부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는 2003년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고급 한정식집 ‘가온’을 열었다. “30년 전만 해도 이탈리아는 그렇게 잘 사는 나라가 아니었어요. 하지만 음식에 이어 패션 등 고급 문화가 세계화 되면서 국가 브랜드가 올라갔습니다. 전통 음식의 세계화가 주는 가치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한 나라의 고급문화를 가장 손 쉽고, 빠르고 생생하게 전달해 줄 수 있는 수단이 바로 음식이다. “식(食)을 제대로 알려야만 의(衣)와 주(住)에 관한 문화를 전파하는 게 가능해져요.”
삼계탕에 전복과 홍삼을 넣어 특화시킨 ‘홍계탕’이 대기업 총수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유명해진 한식당 ‘가온’을 운영하면서 그는 한국 민화를 소재로 한 벽지 ‘자비화’와 전통 증류주인 ‘화요’ 등의 제품을 잇달아 시장에 선보였다. “세계인들이 우리가 만든 전통 식기를 쓰게 하기 위해서 식당을 열었어요. 그런데 그 식당에 어울릴 만한, 한국 문화의 깊이를 보여줄 벽지도 화려한 음식에 걸맞은 술도 없었어요. 제가 나설 수밖에 없었죠.”
그 고집에 걸맞게 그는 한꺼번에 차려내는 한정식 스타일을 포기했다. “전통이요? 무조건 옛 것만을 고수하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외국인들은 일본 스시를 먹을 때는 정장을 합니다. 불고기 먹을 때는 청바지 입어요. 냄새가 배는 데다 다른 한국 사람들도 그렇게 하니까요. 우리 음식의 고급 문화를 개발하지 않은 채 격식 없는 식사만을 우리 ‘전통’이라고 고집해 온 대가가 아닙니까?”
이런 신념에 따라 조 회장은 요즘 우리 음식의 세계화에 몰두하고 있다. 중국 상하이 인근 기업도시인 장자강(張家江)에 지난해 10월 200평 규모의 가온 지점을 낸데 이어 올 3월에는 베이징의 대표적 상업지구인 장안대로에 세워진 LG쌍둥이 빌딩 5층에 ‘베이징 가온’을 연다. 250여평 규모의 ‘베이징 가온’은 1인당 단가가 250~400위안(3만~5만원)인 최고급 음식점이다. “베이징은 세계 각국의 음식들이 경합하는 전쟁터에요. 거기서 일전을 치를 준비가 돼있습니다. 이기면 뉴욕, 파리까지 가는 겁니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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