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왕의 남자’의 이준익(47) 감독은 요즘 하루에 4, 5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평소보다 두어 시간 모자란 수면량이다. 영화가 700만 관객 돌파를 눈앞에 두는 등 일대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3, 4개씩 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에 일정잡기도 빠듯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전혀 들뜨지 않는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 좋아도 지나치게 기뻐 말고 어려워도 지나치게 낙담 말자”는 게 오랜 삶의 부침에서 우러난 그의 현재 심정이다.
일반인에게는 의외이겠지만 영화를 제작하고 수입하며 “상층부와 하층부를 수 차례 왕복달리기”한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그는 관객 숫자에도 초연하다.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둔 사람의 여유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는 영화를 만들 때부터 숫자를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저도 옛날에는 영화에 관객수를 많이 대입시켰는데, 그것은 관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만드는 사람이 몇 만 예상한다는 것부터가 관객 모독이죠. 그리고 많이 본다고 다 좋은 영화는 아니잖아요.”
‘왕의 남자’가 ‘대박’을 맞았다는 말도 그의 귀에는 거슬린다. 그런 말이 나돌면 괜히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기고 열패감을 조장한다는 이유에서다. ‘왕의 남자’ 뒤풀이도 스태프들과 함께 맥주나 한잔 마시며 조용히 치를 계획이다. “‘왕의 남자’때문에 여러 영화가 우수수 떨어져 나갔는데 저희만 꿍짝거리며 즐길 수는 없습니다. 영화로 망해본 사람은 아마 저와 같은 생각일겁니다.”
세종대에서 회화를 전공했던 이 감독은 애초 영화연출은 생각지도 않았다. 합동영화사 선전부장을 거쳐 1993년부터 제작사 씨네월드를 꾸려나가던 그는 어쩔 수 없이 감독이 됐다. 1993년 데뷔작 ‘키드캅’은 10명의 감독이 손사래를 치면서 그가 맡게 됐다. 그가 감독으로서 이름을 널리 알린 ‘황산벌’(2003)도 마찬가지였다. “사극 전쟁물은 만들기 힘들다”고 모두 손을 든 상태에서 떠밀리다시피 감독 자리에 앉았다. “절박감 때문이었죠. 빚은 갚아야 하는데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으니 제가 열심히 할 수 밖에 없었죠.”
연출교육 과정을 거치기는커녕 연출부 생활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만만하다. “감독은 아무나 할 수 있어요.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사람도 혼자서는 영화 못 만들어요. 그저 스태프와 배우 말만 잘 들으면 좋은 영화가 나오는 겁니다.”
십억 단위의 돈을 벌기도, 잃기도 한 그는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에서 자유롭다. ‘황산벌’에서 일개 졸병 ‘거시기’에 주목하고, 광대를 과감하게 왕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묘사한 것도 그의 이런 이력이 바탕이 됐다.
그는 ‘왕의 남자’의 인기 비결을 카타르시스(감정 정화)에서 찾았다. “장생, 공길, 연산군, 장녹수는 각기 다른 고통에 시달리는 인물들입니다. 관객들은 자기 안의 설움과 영화 속 인물들의 고통을 일치시킵니다. 고통은 페이소스(연민)를 낳고 페이소스가 카타르시스를 주는 거죠.”
‘왕의 남자’를 현 정치 상황과 빗대는 일부의 해석에 단호히 “아니오”라며 손을 젓는다. “의도적으로 현 정치를 꼬집지는 않았습니다. 특정 정당이 정치적 명분의 도구로 ‘왕의 남자’를 과대 해석하는 것뿐이죠. 명분의 차이는 입장의 차이잖아요. 그 차이를 좁혀가는 것이 역사와 영화가 해야 할 일이고요. 그 사람들 입장 바뀌면 아마 그 입으로 반대의 소리를 하겠죠.”
이 감독은 3월께 촬영에 들어가는 차기작 ‘라디오 스타’ 준비로 요즘 마음과 몸이 바쁘다. 지직거리는 낡은 라디오처럼 한물간 가수와 매니저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깨달아 가는 이야기인 ‘라디오 스타’에서도 그는 여전히 비주류에 초점을 맞춘다. 차차기작도 이미 정해져 있다.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의 삶을 통해 시대의 제도와 관습을 앞서간 이들의 모습을 담으려 한다.
창작 의욕이 넘쳐나서 차차기까지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로 밥을 먹고 있으니 꾸준히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 안에 창작요소가 가미되는 거죠. 예술인보다 생활인이 더 위대합니다. 생활 속에 예술이 있지 예술 속에 생활이 있습니까. 감독은 예술인이 아니라 생활인입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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