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오전 6시30분. 서울 용산에 위치한 국방부 근무지원단 근무지원대대 10내무실. “빰빰빠빠빠~” 우렁찬 기상 나팔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자 낯익은 얼굴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침상을 정리한다.
홍경인, 여욱환, 지성, 윤계상…. 연예계 활동을 하다 군에 입대한 ‘연예 병사’들의 보금자리다. 정식 명칭은 ‘국방 홍보지원반’.
“똑같죠?” 아침 점호를 마치고 식사를 위해 대기하고 있던 홍경인(30ㆍ탤런트) 상병이 불쑥 건넨 첫 마디다. 실제로 가지런히 정돈된 침상, 관물대에 붙어 있는 가족 사진 등 여느 내무실 풍경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다른 부대에 비해 공간이 협소한 느낌이다.
오전 8시. 출근 시간이 되서야 비로소 이들의 ‘화려한 변신’이 시작됐다. 분대장 여욱환(27ㆍ탤런트) 병장이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갈아 입자 방금 전까지 녹색 견장이 썩 잘 어울렸던 군인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홍보를 주업무로 하다 보니 사복 착용은 불가피하다. 물론 원칙도 있다. 절대로 튀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일터는 부대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국방홍보원. 12명의 연예 병사 가운데 5명은 아침 방송과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 기상과 동시에 출근했을 정도이다.
출근 버스에서 내려 건물에 들어서자 곳곳에 자리잡은 라디오 부스와 녹화 스튜디오가 눈에 들어온다. ‘경고_군사제한구역’이라는 붉은 글씨만 아니라면 영락없이 작은 방송국이다.
한 라디오 스튜디오의 문을 열자 박광현(29ㆍ탤런트) 일병이 진행하는 ‘뮤직닷컴’ 생방송이 한창이다. 재치있는 입담과 능숙한 진행으로 대본을 엮어내는 솜씨가 프로 그 자체이다.
“빠샤!”라는 마무리 멘트와 함께 방송을 마친 그는 며칠 후 휴가를 떠난다는 생각에 잔뜩 들떠있었다. “가족들 보고 싶은 마음이야 군인이라면 누구나 똑같지 않겠어요? 하지만 각자 고유한 업무가 있어 다른 사람이 쉽게 대신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온전히 정기휴가를 쓰는 사람은 드물어요.”
연예병사의 대다수가 인기 연예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오후 2시 2층에 자리잡은 녹화 세트장. KFN(국군방송)에서도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뮤직비디오 순위프로그램‘장병가요 베스트’의 녹화 준비로 분주했다.
연출자인 박정권(32) 병장은 ‘사회’에서 3년간 케이블 채널 연예프로 PD와 VJ로 활동했다. 박 병장을 포함해 6명의 ‘비연예인’ 연예병사들이 작가, 영상편집, 컴퓨터그래픽(CG) 등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은 지난해 12월 개국한 KFN을 통해 방영된다. KFN은 한 달 만에 전체 80여 케이블 채널 중 시청률 순위 30위에 올랐다. 이례적인 성과를 거둔 데에는 연예병사들의 역할이 큰 몫을 차지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연예병사의 장점으로는 ‘업무의 연속성’이 꼽히고 있다. “소위 ‘감(感)’이라는 게 있잖아요? 2년 공백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인데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국가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다는 점은 복이라면 복이지요.”(홍경인 상병)
하지만 고민도 적지 않다. 여욱환 병장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는 연예 병사의 공통된 고민이 담겨 있는 듯 했다. “KFN의 개국은 ‘국민과 함께 하는 군’으로 나아가기 위한 방향 전환입니다. 동시에 저희가 생산하는 콘텐츠가 더 이상 군 내부에서만 소비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지요. 그런데 노출이 잦아지면서 부담이 커졌습니다.” 대중들의 기대에 맞춘다면 사회에서처럼 맘껏 연예인으로서의 끼를 발산해야 하지만, 이럴 경우 “저게 군인이냐, 연예인이냐”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는 얘기다.
박광현 일병도 거들었다. “대중은 우리가 연예인이기 때문에 재미와 감동을 주는 최상의 상품을 요구합니다. 반면 계급적 성격이 가미된 군인다움도 동시에 바라지요. 자율성이 제한된 상태에서 활동폭이 좁아지다 보면 ‘장병들을 위한 방송’이라는 본래의 취지는 퇴색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후 5시. 연예병사들이 하나 둘 귀대 차량에 몸을 싣는다. 그러나 복귀하는 인원은 고작 6명. 저녁 생방송이나 다음 날 프로그램 준비로 잔업과 야근이 잦기 때문이다. 귀대시간이 자정을 훌쩍 넘기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 내무실 TV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깔깔거리기도 하고, 미뤄둔 빨래를 하기도 한다. 전역이 다가온 고참 병장들은 영어공부 삼매경에 빠졌다.
조용하던 내무실이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포상휴가와 외박이 걸려 있는 ‘설 맞이 내무실 대항 체육대회’소식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제사보다 젯밥(휴가)에 눈이 가기는 어느 군인이나 마찬가지가 아닐 까. 얼굴에 화색이 돈 병사들은 즉시 머리를 맞대고 선수 선발 회의를 시작했다.
중대장 김근모(30) 대위는 연예병사의 정체성은 ‘군인’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예병사들도 사격ㆍ유격 훈련, 경계 근무 등 부대 내 모든 업무를 똑같이 합니다. 군 홍보의 최전선에서 노력하는 이들인 만큼 기존에 갖고 있던 연예인의 이미지는 잠시 잊어주는 게 이들의 군 복무에 도움이 됩니다.”
밤 10시. 취침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막사의 불이 모두 꺼지면서 분주했던 하루도 막을 내렸다. ‘나는 알고 있다.’ 곽태근(예명 지성ㆍ30ㆍ탤런트) 일병의 관물대 앞에 써 있는 글귀다. “연예인 지성이 아닌 군인 곽태근으로서의 본분을 항상 잊지 않겠다”는 그의 설명에서 군인으로서, 연예병사로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초심을 지키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김이삭 기자 hir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