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과 대중매체는 안타깝게도 궁합이 잘 맞지 않는다. 모름지기 국악은 직접 들어야 제 맛이다. 어쩌다 판소리를 눈 앞에서 듣다 보면 저절로 흥이 나서 노래하는 이와 청중이 하나가 됨을 느낀다. 방송사 국악 프로그램은 이같은 직접 경험을 시청자에게 전달하려 애써 보지만 관중들이 얼씨구 하며 흥에 겨워 매기는 추임새가 못내 아쉽다.
인터넷 공간에서 댓글은 판소리의 추임새와 같다. 언론사나 포털의 뉴스 사이트에는 기자나 논객들이 쓴 글에 독자들이 즉시즉시 반응하는 댓글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독자는 글쓴이가 제공하는 정보와 분석, 논지에 추임새를 매기고 글쓴이는 그 추임새에서 독자들의 반응을 살핀다. 인터넷은 이처럼 필자와 독자가 상호작용 하는 쌍방향의 민주적 매체이다.
그런데 요즘 뉴스 사이트의 댓글들을 살펴보면 과연 댓글이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기여를 하는가 묻게 한다. 온갖 비방과 입에 담지 못할 욕설, 수준을 논하기도 어려운 저질 발언들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댓글에 들을만한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 법칙이 작동해 비방과 저질 발언만 남게 됐다.
나와 다른 의견을 우선 존중하고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이해갈등을 조정하는 공간에서만 민주주의는 꽃을 피운다. 남의 의견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격적인 언사를 내뱉는 악성 감정의 분출구가 돼버린 댓글 공간에서 지금 민주주의는 맥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 가장 민주적인 공간인 인터넷에서 댓글은 가장 비민주적인 행패를 부리고 있다.
댓글 공간에서는 침묵의 나선(소용돌이)이 흐르고 있다. 침묵의 나선 이론은 독일 나치의 공격적인 여론몰이 앞에서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목소리가 깊은 침묵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불행한 민주주의 역사를 설명한다. 적어도 지금의 댓글 공간에서는 건전한 시민의 목소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이성과 합리는 떠나고 야유와 공격만 남았다.
댓글이 왜 이 지경인가, 푸념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무시하라고 충고한다. 기자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언론사들이 비방과 저질 발언만 넘쳐나는 댓글 공간을 무시하고 방치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더욱 한심한 일은 댓글을 마치 여론인양 둔갑시킨 보도까지 등장하고 있다. 정확한 표본을 근거로 한 여론조사도 아닌, 댓글의 찬반 비율이나 인기투표식 인터넷 조사 결과를 여론처럼 보도하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물론 댓글은 갈등적 사안에 대해 어떤 집단이 어느 정도 흥분해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래서 댓글이 전체 시민의 의견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 여론의 움직임을 읽게 만드는 지표 역할을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합리와 이성, 절도가 없는 댓글의 폐해는 정도가 지나쳐 건전한 여론 형성 과정을 망가뜨리고 있다.
언론들은 인터넷 시대를 맞아 앞다투어 기사 댓글 제도를 도입했다. 인터넷 댓글이야말로 일방적으로 기사를 제공하는 종이신문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민주적 장치라는 수식어도 뒤따랐다. 그러나 인터넷 강박증에 눌려버린 언론들은 댓글이 불러올 수 있는 민주주의 파괴 현상에 대한 성찰이 부족했고, 애써 눈을 돌리기도 했다.
세계적인 권위지라는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의 인터넷판은 현재 기사에 대한 댓글 제도가 없다. 한때 기사 댓글을 운영했지만 쓰레기 글들이 너무 많이 올라와 명예훼손이나 프라이버시 침해와 같은 법적인 문제가 제기되자 폐지했다. 절제가 없는 의견은 시민 여론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 기사 댓글 폐지의 이유이다.
최근 무절제한 인터넷 댓글은 유죄라는 판결이 나오고 있다. 일부 인터넷 포털도 댓글 관리에 나서고 있다. 이제 언론이 나설 차례다. 책임이 전제되지 않은 표현의 자유는 방종일 뿐이다. 언론은 댓글 민주주의에 대한 착각과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기사 댓글을 과감히 폐지하고 제대로 된 시민의 추임새를 들을 수 있는 토론광장을 활성화하자.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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