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에서 큰 논쟁을 일으켰던 영화‘거짓말’(장선우 감독)의 주인공이 사진 예술계의 스타로 부활했다. 작가 이상현(51)씨. 외환 위기와 세기말의 우울함이 거리를 부유하던 1998년 겨울, 영화는 남성 조각가와 여고생의 변태적 성 행위를 담았다는 이유로 외설 시비에 휘말렸다.
두 차례의 등급판정 보류 등 우여곡절 끝에 2000년에야 개봉됐지만 당시 남자 주인공으로 출연한 이씨는 하루 아침에‘패륜아’로 낙인 찍혀 5, 6년간 예술가로서의 삶을 접어야 했다.
그런 이씨가 지난해 12월17일 제1회 한미사진미술상을 수상했다. 20일부터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가나아트센터 레지던스 프로그램 제2기 졸업전(아뜰리에 사람들 Ⅳ)에 참가하고 있는 이씨는 “너무 기쁘고 놀라 상을 받을 때 손이 떨릴 정도였다.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씨의 한미사진미술상 수상은 이래저래 화제를 모았다. 한미약품이 상금 2,000만원을 내걸고 처음 시상한 이 상은 지난 2년간 국내에서 열린 사진전 중 가장 성취도가 높았던 작가를 선정해 수여했다. 이씨는 단 두 번의 사진 개인전으로, 그것도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외설 파문 이후 긴 공백기에 대한 보상을 받은 셈이다.
“한동안 숨어살다시피 했어요. 영화 불법 CD가 30만장 이상 유통됐으니, 거리에 나서면 저를 알아본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친지나 친구들조차 ‘네가 그럴 줄 몰랐다’며 등을 돌리고…. 이 사회에는 넘어선 안될 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죠.”
이씨의 영화 출연 계기는 의외로 단순했다. 중앙대에서 사진을 공부한 뒤 독일 베를린 국립조형미술대학 조소과에서 마이스터슐러(석사) 학위를 받고 유럽에서 활동하던 시절, 외환 위기가 터지면서 이씨는 잠시 귀국했다. 그때 지인을 통해 소개받은 장선우 감독으로부터“극중 인물도 조각가니까 한번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고, 선뜻 받아들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다. 이씨의 작품을 샀던 고객은 환불을 요구했고, 초청 전시를 열기로 한 국내 굴지의 상업 화랑에서는 전시 취소를 통보했다. 한 미술상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 ‘박하사탕’의 비디오테이프를 내놓으며“그렇게 배우가 하고 싶으면 이런 좋은 영화를 할 일이지…”라며 혀를 차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씨는 지금도 그 영화가‘나쁘다’기 보다는‘슬프다’는 생각이다. 부조리한 세상이나 불온한 사랑을 이야기하는 표현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2004년 가나아트센터 레지던시 프로그램 2기 작가로 선정되면서 다시 작업을 시작한 이씨는 기존의 설치와 조각에서 사진쪽으로 방향을 크게 수정했다. 과거 사건은 그에게 이미지의 거짓 속성에 대한 성찰을 가져왔다.
“지난해 개인전에 여장(女裝)을 한 사진을 내놨는데, 관람객 반응이 재밌더군요. 작품 속의 저를 여자로 아는 거예요. 마치 영화속의 주인공과 현실의 나를 동일한 인물로 오해하는 것처럼요. 사진의 이미지와 진실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것, 결국 이미지란 환상이거나 관람객 자신이 만든 허구에 불과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졸업전은 이씨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전시관 한 층을 그의 최근작인‘리틀 시타르타-도원(桃園)’ 시리즈 10여점으로 채웠다. 시타르타는 붓다가 열반하기 전 수행할 때의 이름.
이씨는 ‘어불외망’(漁不畏網ㆍ무심한 그물에 고기가 잡힌다, 즉 아무리 학문이 높아도 이루지 못하는 경지가 있다는 뜻의 사자성어)이라는 주제의 사진 콜라쥬를 통해 현대인을 ‘수행자’로, 현실의 욕망을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화수분’에 빗대어 자본주의 사회의 공허와 인생의 아이러니를 말한다.‘거짓말’이 작가에게 남긴 질문은 뿌리가 깊고 질기기까지 한 듯하다.
● 가나아트센터에서는…
유망작가에 작업공간 제공… '아뜰리에' 2기생 졸업전 열려
유망 작가들에게 작업 공간을 제공하는 가나아트센터의 레지던시 프로그램 '가나아뜰리에' 2기생들의 졸업전이 가나아트센터에서 20일 개막해 2월12일까지 계속된다. 선정 작가 9명 대부분이 2년의 입주기간 동안 스타급으로 발돋움해 오랜 만에 볼만한 전시회가 될 전망이다.
참가 작가는 사진미술 분야에서 급부상한 이상현씨를 비롯, 설치작가 박은선 안규철 김아타 고낙범씨, 미디어아트 양만기씨, 평면회화 박영남 하상림 홍경택씨 등이다.
홍경택씨는 현대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강렬한 채도의 색채와 기호들을 반복하는 편집증적 회화 작업들을 선보인다. 안규철씨는 버려진 피아노나 장롱, 책상, 의자 등에서 떼어낸 다리 부분만 조합해 건축적인 오브제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을 보여준다.
선과 면이 만나 일으키는 착시 효과를 통해 공간감을 불어넣는 박은선씨의 기하학적 설치작업도 눈길을 끈다. 김아타씨는 朱ダ攘測釉?한 시점에서 장시간 촬영해 긴장감이 도는 냉전지대를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로 변화시키는 사진작업을 선보인다.
가나아트센터 큐레이터 조의영씨는 "상업화랑으로는 처음 시도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라 작가들의 실험성이 제대로 발현되겠느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결과는 예술성과 상품성 면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02)720-1020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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