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기의 어느 날, 그들은 길을 나섰을 것이다. 누구나 동경하지만 아무나 나서지 못하는 길. 얻고 또 버리기 위한 일상의 탈출. 한 사람은 멀리 티베트와 인도를 돌며 사람들을 만났고, 또 한 사람은 유럽의 한 유서 깊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먼 길을 돌아온 그들이 책을 썼다. ‘희망과 치유의 티베트ㆍ인도 순례기’라는 부제를 단 정희재(37)씨의 ‘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샘터사, 1만2,000원)와 ‘태어나 먹고 자고 말하고 연애하며, 죽는 것들의 구원’이라는 긴 설명이 붙은 서동욱(39)씨의 ‘일상의 모험’(민음사, 1만8,000원)이다.
두 책은 서술의 대상과 내용, 형식 면에서 사뭇 다르다. 전자가 서정의 문체로 여행(혹은 순례)의 일상을 전한다면, 후자는 사유의 문장으로 일상의 이면을 뒤집어 보인다. 그러므로 두 책의 접점을 찾는 것은 자의적이고, 무모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희망’과 ‘구원’은 그리 멀지 않은 말이다.
유년시절부터 집 바깥을 떠돌았고 14살부터 노동을 해야 했다는, 곡절 많았을 이력의 정씨. 그에게 여행의 내력은 사랑의 기원처럼 아득하다. “사랑하는 사람은…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그 사람과 함께 해온 듯한 익숙함과 밀착된 영혼의 결합에 대해 지상의 시간을 빌려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306쪽)
그의 순례는 그렇게 시작됐고 이어졌다. “내 발바닥에는 오래 전부터 사막의 무늬와 티베트 고원에 홀로 삭아가는 바위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밤에 숙소에 누우면 발바닥이 혼자 징처럼 떨며 인생의 격정과 슬픔, 추억을 노래했다.
어쩌면 우리의 영혼은 발바닥에 있는 게 아닐까.” 그는 인도의 티베트 난민 정착촌과 신의 땅 ‘라사’, 고원의 오지를 누비며 친구들을 만났다.
그들의 상처를 통해 자신의 지난 상처를 떠올리기도 하고, ‘내면의 허기’로 서로의 눈빛을 응시하기도 한다. “전쟁과 여행은 삶에 굶주린 사람들이 벌이는 행위라는 점에서 닮았다. 군인은 타인을 파괴하고자, 여행자는 자신을 무너뜨리고 새 신화를 쓰고자 떠난다.”
땀과 눈물에 젖은 손수건을 촛불의 온기로 말리며 떠돈 그 시간으로 하여, 그는 삶의 주린 욕망을 풀었을까. 그는 “그림자를 묻어버리려 했던 사람처럼,…나는 자신을 유기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말한다. “그림자를 없애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몸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착각을 버리는 것임을. 그림자와 싸우지 않고, 그림자를 만드는 몸의 실체를 고요히 바라봐야 하는 것임을.”
그 동안 서동욱씨는 일상의 행위 속에 내재된 구원의 의미를 찾아 책 속을 헤맸을 것이다. 그는 생애 마지막 나날의 카프카가 집착한 것이 죽음에 대한 ‘철학적 관조’가 아닌 ‘일상적 삶’이었다는 전언으로 자신의 책을 연다. 신문이 비싸다는 불평, 누군가 맥주를 힘차게 마시는 모습을 보고싶다는 희망 등등.
그는, 삶이란 결코 스스로 완성되지 않으며, 다만 그 너절한 일상 속에서 구원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문학이 전하는 일상의 질료에 철학적 사유를 삼투시켜 그 속에 내포된 구원의 맹아들을 추출해낸다.
가령 ‘잠’이 있다. 그에게 잠은 “의식, 즉 주체의 근본이 탄생하는(구원되는) ‘자리’”다. 잠 속에서 사람은 깨어있는 자기를 잃고, 세계와의 관계도 끊는다. 세상만사를 망각할 수 있는 ‘은신처’다.
하지만 깨어나면서 잃었던 자신을, 세계와의 관계를 회복한다. 잠에서 깨어난 뒤 벌레로 변해버린 ‘변신’(카프카)의 주인공 ‘잠자’가 부르짖는 비명은 구원의 상실, 곧 잠의 축복으로부터 소외된 자의 절규였던 것이다.
“모험의 신화가 끝장났고 구원의 역사가 종말을 고한 이 시대에도…인간이라는 빈자(貧者)는 깊은 잠 속으로 들어선다.” 그가 선택한 일상의 메뉴들은 소통, 자기기만, 얼굴, 패션, 웰빙, 이름, 글쓰기, 춤 등 다양하다. 그 모든 일상 속에 초월의 계기, 구원의 에너지를 확인하는 일은 흥미진진하다.
그렇게 이들 두 책은 아득한 거리를 두고 만난다. 이들이 전하는 삶에의 긍정은 불안과 회의에 눌려 일상에 주저앉고 마는 숱한 이들에게 주는 값진 위안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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