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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실에서] 직분을 잃어버린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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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실에서] 직분을 잃어버린 사회

입력
2006.01.21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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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물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장소와 환경이 있다. 취사도구와 식기류는 주방에 있어야 하고 귀금속은 장롱 속에 보관해야 한다. 깨지기 쉬운 것은 낮은 곳에 두고 떨어져도 깨지지 않을 것을 높은 곳에 둔다. 아무리 좋은 그림도 창고에 걸려서는 가치를 잃고 아무리 비싼 구두라도 거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사물에는 존재의 질서가 있다.

사람 역시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을 때 자연스럽고 빛이 난다. 못나고 부족한 사람이라도 그 쓰임새를 필요로 하는 자리가 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도 마땅히 있을 곳에 있지 않으면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손가락질을 당한다.

서로 이가 맞지 않는 기계가 날카로운 소음을 내듯 사물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으면 조화가 깨어져 혼란과 불안을 일으킨다. 사람도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을 때 불화와 갈등, 혼란이 생긴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갈등과 혼란은 적재적소(適材適所) 원칙의 적용 정도와 반비례한다고 보면 틀림없다.

●적재적소 안 지킬 때 파국 불러

황우석 교수 파동도 과학자 교수로서의 제자리를 벗어났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연구하고 가르치는 본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정치인 기업인 스타의 흉내를 내다 파국으로 치달은 모습이다. 서울대 조사위원회의 발표와 MBC PD수첩의 보도 등을 보면 황 교수는 사이비교주를 닮은 우상의 길을 걸어왔음을 깨닫게 된다.

본의든 아니든 황우석 우상 만들기에 연루된 사람들과 집단 역시 제자리를 지켰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황 교수를 정치쇼의 하이라이트로 이용하려 한 정치권, 국익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황 교수를 상찬해 마지 않았던 언론, 그리고 이런 회오리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후원자들과 국민들 역시 잠시 제자리를 잃고 허둥댔다.

황 교수로부터 정치후원금을 받은 정치인들도 제자리에 바로 선 사람으로 볼 수 없다. 청와대 정보과학기술보좌관 역시 본연의 직분에 충실했다면 우상과 함께 파안대소하고 연구비를 받는 부끄러운 짓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통령까지 황 교수의 연구현장을 방문하곤 “감전됐다”고 했으니 광풍에 휩쓸리지 않고 제자리 지키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일”이라는 짧은 논평으로 손을 털려 한다면 후안무치의 극치다.

힘깨나 쓰는 인사들이 일개 브로커에 농락당하고 장관이 아연실색할 취중 독설을 내뱉는 것도 제자리와 그 자리가 요구하는 본분을 망각했기에 일어난 것이다.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 내정자를 둘러싼 논란도 개인의 인간 됨됨이보다는 적재적소의 원칙에 맞는가 여부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유시민의원의 장관 내정이 노 대통령이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사안의 하나이고 열린우리당의 당권 주자들과 함께 차세대 또는 차차세대를 이끌 지도자 재목 군(群)에 포함시켰다 해도 장관 자리를 국정경험 쌓는 곳 정도로 여긴다면 적재적소라는 통치철학은 이미 실종됐다고 봐야 하다.

국민들 스스로 과연 대통령은 대통령답게 대통령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갖는 것 자체가 불행이다. 대통령을 못해 먹겠다고 하더니 탈당까지 검토했다니 다시 한번 적재적소의 철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혹시 김영삼 김대중 전대통령처럼 정치 맹주들의 전철을 밟겠다는 것은 아닌지 오해를 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국민을 위한, 국가의 미래를 위한 원대한 포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차세대 지도자들이 대통령에서 물러난 사람을 지켜주기를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거창한 화두보다 직분이 최우선

한두 마리의 미꾸라지가 냇물을 흐리는데 청와대나 집권여당의 핵심 인사들이 제자리를 못 지키고 우왕좌왕하니 국민들이 불안과 혼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대통령이 신년연설을 통해 국정의 최우선을 양극화 문제 해결에 두겠다고 밝혔지만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성과를 기대하기 힘든 거창한 화두를 던지는 일보다는 제자리를 지키고 직분을 다하는 모습이다.

제자리를 벗어나 공허한 ‘경제 올인’을 외치는 것보다는 ‘경제 올인’은 안 해도 좋으니 각자 직분에 충실하기를 국민들은 바라고 있다.

방민준 논설위원실장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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