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편집국에서] 돈 덜 들이고 할 일도 많다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편집국에서] 돈 덜 들이고 할 일도 많다

입력
2006.01.20 09:09
0 0

11일 밤 신년 연설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건들거리는’ 걸음새를 볼 수 없었다. KBS 9시 뉴스 여성앵커는 밤 열 한 시 반부터 생중계될 월드컵대표팀의 새해 첫 평가전이 기대된다며 생긋 웃는 미소로 뉴스를 마쳤다.

곧 이어 아일랜드의 사회협약과 도요타의 인간존중 경영사례를 버무린 자못 비장한 공익광고가 흐르더니, 화면을 가득 채운 빛무리 속으로 노 대통령의 생기 넘치는 얼굴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대통령은 ‘고독한 하이에나’ 같은 특유의 걸음새 대신 차가운 의지의 힘을 내뿜었다.

이날 노 대통령은 ‘뚜벅 뚜벅 앞으로 나아가는’ 어조로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양보와 희생을 강조했다. 오늘의 고통을 감내하자는 호소도 나왔다. 왜? 이렇게 해야 미래의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게 되고, 국민 모두가 공평하게 잘 살며, 사회적 비극이 거의 없는 올바른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연설 제목이 ‘책임 있는 자세로 미래를 대비합시다’기 때문에 섣불리 토를 달면 ‘무책임한 짓’이 되도록 애초부터 돼있었다. 여기에 더해 연설의 상당 부분도 언론 등의 ‘대안 없는 무책임한 비판’을 개탄하는 말로 채워졌다. 하지만 기자는 또다시 비판한다. 대안은 없다. 왜? 점잖게 표현해 비판이지, 실은 대통령의 생각에 대안조차 필요 없는 반대입장이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 잘 하신 일 많다. 다 안다. 이 다음에 노 대통령이 이런저런 분이었다고 회고할 수 있도록 마음 한 켠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곳곳에 논리적 모순과 정책적 상충이 적지 않지만, 이번 연설의 대체적 주장도 옳다. 국가 경쟁력 키우고, 양극화 해소하며, 복지를 증진하고, 대국민 서비스를 넓히겠다는 데 누가 시비를 걸 수 있겠는가.

이 자체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반대하는 건 미래를 위해 재정규모를, 공무원과 공공서비스 분야 종사자수를, 세금으로 거둬들이는 돈의 액수를 지금부터 ‘당장’ 늘려나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통령이 연설에서 지적한대로 1997년 경제위기 이래 수 십만 개의 정규 사무직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무엇보다도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 말이 좋아 중산층이지, 사실은 도시 서민이었던 사람들이다. 오늘도 넥타이 매고 부지런히 직장에 나가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봉급 한 푼 제대로 올려 받지 못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절대빈곤층이나 차상위계층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나름대로 버티느라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런 서민들이 요즘 근로소득세율 인상과 각종 소득공제 축소, 가스요금에서부터 의료보험료에 이르기까지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각종 공과금과 부담금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다.

기자는 정부가 ‘책임 있는 자세’로 미래를 대비하려고 불가피하게 재정규모를 늘려야 할 때라도 가급적 지켜져야 할 원칙이 있다고 믿는다. 그건 국민 다수가 그나마 쥐고 있는 ‘밥그릇’에서 뭔가 빼앗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선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누구나 공감하는 공통의 선이라면 국민 다수의 돈벌이가 지금 보다는 나아질 때 박탈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방식으로 시작해도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다행히 견조한 경기회복세가 오래 이어지면 대통령의 임기 내에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대안 있는 비판’을 요구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바꾸지 않으면서 그것을 고스란히 실현해낼 다른 방안 만을 대안으로 친다면 기자는 차라리 지금 당장 재정확대에 들어가겠다는 대통령의 생각에 확실한 반대를 표하고 싶다.

당장 돈을 덜 들이고도 할 수 있고, 하루 빨리 해야만 하는 역사적 과제는 아직도 많지 않은가. 노사간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일, 정부의 생산성을 높이는 일, 고소득 전문직 과세체계를 가다듬는 일 등은 흔쾌히 지지할 용의가 있다.

장인철 경제부 차장대우 icj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