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1ㆍ18 신년 연설은 임기 후반기 국정운영의 초점이 미래와 서민에 모아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목을 ‘책임 있는 자세로 미래를 대비합시다’라고 잡고, 연설의 상당부분을 양극화 해결과 사회적 약자 배려에 할애한 데서도 그런 방향성이 드러난다.
노 대통령이 제시한 과제는 양극화 해소를 비롯 저출산ㆍ고령화사회 대책, 국민연금 개혁, 조세ㆍ재정 개혁 등이다 지난 3년 동안 주로 현재의 위기 극복과 과거사 정리에 관심을 가졌다면, 앞으로는 미래 과제 해결에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재계, 노동계 등 모두가 책임있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 네 가지는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만 재정과 복지 예산의 대폭 확대라는 부담이 따른다. 국민연금 개혁만해도 보험료를 더 많이 내고 연금은 적게 받는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국민의 조세부담률도 중장기적으로 높아지는 흐름이다. 따라서 이들 과제는 장기적으로는 꼭 해결해야 하나 단기적으로는 여론의 저항을 감수해야 하는 난제들이라 할 수 있다.
노 대통령도 이런 점을 고려, 국민연금과 조세 개혁의 구체적 해법을 제시하지 않았다. 조세 개혁에 대해 “감세 등의 정책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근본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면서 조세부담률 인상 필요성을 시사하는 언급만 했을 뿐이다.
갑자기 세금 부담을 높이는 방안을 내놓을 경우 충격과 반발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세부적 해법은 취임 3주년인 내달 25일께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미래 과제의 제시는 역(逆) 발상의 승부수로도 볼 수 있다. 지지도가 낮은 상황에서 별로 효과도 없는 인기정책을 내놓는 대신 30년 이후를 대비, 어려운 과제들을 해결하자고 호소하는 방식으로 애국적인 리더십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만약 서민생활 개선, 양극화 해소 노력을 통해 노 대통령의 진정성이 부각된다면 기존 지지층을 결집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5월 지방선거와 내년 대선을 염두에 둔 카드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청와대는 “IMF 이후 심화돼온 양극화 문제를 해소하지 않고는 국민통합도, 내실 있는 경제발전도 어렵다”면서 정치적 해석을 일축했다.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양극화 해소를 위한 정책들이 구체적으로 추진될 때는 선거용이냐, 아니냐는 시비와 함께 ‘성장과 분배 중 무엇이 우선이냐’는 본질적 논쟁이 벌어질 공산이 크다.
김광덕 기자 kdkim@hk.co.kr
■ '노대통령 신년연설' 양극화 해결 어떻게
양극화는 곤궁과 함께 좌절을 동반한다. 모두가 일을 해야 경제가 돌아가는데 일할 자리도, 일할 의욕도 꺾어버림으로써 아예 성장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양극화다.
이 점에서 양극화는 한국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문제들의 ‘알파’이자 ‘오메가’다. 당장의 5% 성장도 시급하지만, 양극화의 간극을 1%라도 줄이는 것이 ‘지속 가능한 경제발전’을 위해선 더 중요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18일 신년연설에서 집권 후반부로 접어든 참여정부의 경제운영 아젠다로 ‘양극화 해소’를 제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한국경제의 양극화가 다른 나라들의 그것보다 훨씬 고약한 것은 중층(重層)구조 때문이다. 노 대통령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등 다양한 갈래의 양극화가 우리 경제에 얽혀 있음을 지적했다.
세계 어디에서도 손색 없는 초우량 글로벌기업, 그러나 나머지 대다수 중소기업은 생존과 몰락의 담장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것이 우리 경제 양극화의 단면이다.
노동의 양이나 질에 관계없이 단지 고용형태에 의해 급여와 복지가 결정되는 비정규직 현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결과 중소기업 근로자들의 월급은 대기업 동료들의 60%에 머물러 있고, 비정규직 역시 옆자리 정규직원의 60% 수준에 불과한 급여를 감수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양극화 해법으로 2단계 처방을 제시했다.
첫째는 일자리 창출이다. 한편으론 중소기업 육성을 통해 일자리를 만들고, 다른 한편으론 문화ㆍ관광ㆍ레저산업 및 교육ㆍ의료서비스 활성화로 일자리 창출과 함께 해외로 빠져나가는 국부를 국내소비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공무원을 포함한 공공서비스부문도 마찬가지다. 노 대통령은 “(선진국에 비해 인력이 부족한)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안정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대국민 서비스의 품질과 삶의 질을 높여나가야 한다”며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작은 정부’론을 일축했다.
비정규직 문제해결을 위해선 노사 양측의 결단을 촉구했다. 대기업 노조는 노조대로 기득권에 대한 양보를, 사측은 사측대로 정규직을 늘리는 발상의 대전환을 더 이상 외면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두번째 처방은 사회안전망 확충. 일자리를 만들고 양극화의 간극을 좁혀도 끝내 ‘사회적 약자’로 남게 되는 계층에 대해선 정부가 직접 보호할 수 밖에 없다는 논지다.
노 대통령은 금년중 기초생활보호대상자를 12만명 늘리고 2009년까지는 치매ㆍ중풍노인과 중증장애인을 국가가 돌보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집값(부동산가격)과 학원비(사교육비)도 양극화와 무관할 수 없다. 부동산가격 폭등은 서민들의 내집 마련 꿈을 꺾고 임대료부담을 가중시킴으로써 ‘자산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망국적 사교육비 역시 저소득층의 교육기회를 박탈함으로써 빈곤의 대물림, 세대를 이어가는 양극화의 주범이다. 구체적 해법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노 대통령은 확고한 집값안정의지를 재천명했으며, 교육문제 역시 “지금 초등학생들은 입시지옥에서 해방되고 10년안에 사교육비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노 대통령의 이런 양극화 해소구상이 얼마나 탄력을 받을 수 있느냐는 점이다. 양극화의 괴리를 좁히고 ‘약자’를 보호하려면, 어떤 형태로든 ‘강자’의 양보와 희생이 뒤따른다. 양극화의 일정 부분은 제도개혁으로 개선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많은 돈이 드는 작업이다.
노 대통령도 재정규모 및 복지예산 확대 필요성을 시사했다. 비록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증세(增稅)가 불가피하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세금을 늘리면 아무래도 ‘가진 쪽’의 부담이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현 정부에 대한 부유층 및 일부 중산층의 이반(離反)심리는 더 커질 수 있고, 재계는 재계대로 ‘파이부터 키우자’는 예의 성장우선론으로 반격해올 것이 뻔하다. 기득권을 가진 노조도 달가워할 리 없다.
그렇다고 사회적 통합을 위한 양극화 해소를 사회적 동의나 지지 없이 무작정 밀어붙이기도 힘들다. 양극화 해소를 향한 참여정부의 여정이 험난해 보이는 것도 이런 딜레마 때문이다.
이성철 기자 sclee@hk.co.kr
■ 연설 스케치/ "3년동안 고생한 국민에 송구"
노무현 대통령은 18일 밤 백범기념관에서 행한 신년연설의 서두를 ‘송구함’으로 열었다.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재계, 노동계 등 사회 전체의 책임과 결단을 호소했으며 결론은 희망으로 맺었다.
노 대통령은 “지난 3년간 정말 고생 많았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고 운을 뗐다. 그러나 곧바로 “반가운 소식도 있다. 경제가 좋아지고 있다”면서 수출 증가, 내수회복 징후를 수치를 들어가며 설명했다.
임기 전반은 힘들었지만 이제부터는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강조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 “우리도 손 놓고 있지 않을 것”이라는 등 연설의 곳곳에서 자신감과 희망을 불러일으키려는 노력이 묻어났다.
그러면서도 ‘잘못된 통념과 인식’을 깨뜨리기 위해 애썼다. 우리나라의 복지예산 비율이 선진국에 비해 상당히 낮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참여정부가 좌파라는 논란은 결코 사리에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골프와 같은 고급서비스에 대한 국민 인식도 달라져야 한다”고도 했다.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교육 레저 의료 등 각 분야의 서비스를 고급화, 해외로 나가는 돈을 막고 외국 돈이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용주의적 변화가 읽히는 대목이었다.
쓴 소리도 아끼지 않았다. “경제난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끊임없는 위기설과 파탄론” “사회 지도층까지 비관적 전망을 쏟아냈다”는 등 예의 직설적인 지적을 던졌다.
그리고 연설의 마침표는 “임기 안의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멀리 내다보고 뚜벅뚜벅 가겠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해낼 것이 없다” “기적의 행진을 이어가자”는 희망의 메시지로 채색했다.
이번 연설은 이례적으로 청와대나 방송사가 아닌 서울 효창동 백범기념관에서 진행돼 눈길을 끌었다. 청와대는 국립중앙박물관과 백범기념관을 놓고 고민하다 독립운동을 통해 조국의 미래를 준비했던 김구 선생의 정신을 살리자는 취지에서 이 곳을 택했다.
기념관에는 공무원 100명, 직장인 42명, 학생 50명 등 총 230여명이 참석했다. 연두기자회견은 25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별도로 예정돼 있어 이날 질의응답은 없었다. TV로 생중계된 연설은 9시뉴스와 축구대표팀 평가전 사이인 밤 10시에 이루어져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김광덕 기자 kd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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