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정부 초반 청와대의 고위직을 지냈던 인사의 경험담. 한 번은 야당 중진과 식사를 함께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식사가 끝날 즈음 상위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가자 상대방이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수첩을 꺼내 메모를 한 뒤 그냥 일어서자 그 중진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오히려 자신이 민망했노라고 털어놓은 청와대 인사는 당시 정무수석이었다. 이전 정권에서는 청와대 정무수석이 정치권 인사를 개별적으로 만나면 ‘봉투’를 건네는 것이 관행이었던 만큼 그 야당 중진의 기대와 실망은 무리가 아니었다.
▦ 청와대 정무수석은 청와대와 여의도의 정치권 간의 관계를 조율하던 자리였다. 우아하게 얘기하자면 소통을 담당하던 창구지만 여당에는 청와대의 뜻을 밀어붙이고 야당을 상대로는 달래고 어르면서 청와대 의도대로 정치를 끌어가는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정치권의 이면사를 들어보면 청와대와 정당간 원활한 소통 이면에는 일정 부분 ‘봉투’의 역할이 있었다.
대통령 통치자금 명목으로 안기부예산 일부가 정무수석실에 지원됐다는 것은 잘 알려진 비밀이다. 그러나 DJ정부 들어 통치자금 운용이 중단됐고 정무수석들도 윤활유 없이 업무를 수행했다.
▦ DJ정부 이후 청와대 정무 기능은 별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정무수석에 임명된 인사들의 급이 낮아진 것도 이유였겠으나 정무수석에게 주어진 수단이 예전에 비해 크게 축소됐다는 점 또한 무관치 않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2004년 초 유인태 정무수석이 물러난 뒤 한동안 정무수석을 공석으로 남겨두었다가 결국 정무수석 자리를 폐지했다.
당ㆍ청 분리 차원에서 정무수석의 역할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부여됐다. 그랬던 정무수석직을 부활하자는 논의가 여권에서 분분하다. 여권 내에 이 문제를 본격 논의하는 태스크포스도 만들어졌다.
▦ 유시민 복지부장관 내정을 둘러싼 당ㆍ청 갈등이 당ㆍ청 간 소통부재에서 비롯됐기 때문에 정무수석을 되살려야 한다는 논리는 그럴 듯하다. 그러나 여권 일부 인사들의 주장대로 당ㆍ청 갈등이 단순한 소통부재가 아니라 근본적인 인식차에서 기인한다면 정무수석을 부활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과거 3김은 자타가 인정하는 정치리더십에다 ‘봉투’의 힘을 보태 당내 통합을 이끌었다. 정치리더십도 다른 수단도 부족하다면 정체성에 따라 헤쳐 모이는 것이 정답일지 모른다. 애써 부인하지만 노 대통령의 탈당 언급이 그냥 나온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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