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들어 우리 교육은 배우는 자는 즐거움이 없고 가르치는 자는 보람이 없다. 학생은 있어도 제자는 없고 교사는 있어도 스승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개정된 사학법이 교문 앞에 대기하면서 우리 교육의 혼란과 위기는 오히려 점점 커져만 가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학법은 과연 우리 교육의 헝크러진 모습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교육이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책임을 논하자면, 법적으로 정책적으로 교육 발전을 주도한 정부가 먼저 종아리를 걷어 올려야 하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한 학교 역시 깊이 고개를 숙여야 한다.
그러나 어찌 이들만의 잘못이겠는가? 급변하는 사회가 끓임없이 시대에 부응하는 변화를 요구하면서 교육을 흔들었고, 물질적인 가치가 범람하는 가운데 교육이 가꿔야 할 인성의 순화는 표류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니체의 말을 빌리면, 우리 각자가 창조적인 원인이요, 최초에 천체를 움직인 프리멈 모빌레(primum mobile)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교육 현실은 이처럼 총체적이고 복잡하건만, 사학법 개정만이 교육개혁의 관건인 것처럼 논의의 방향이 왜곡되고 있다.
이는 마치 오랜 지병과 합병증으로 온 몸이 피폐해진 중환자에게 어느 한 부위 수술을 시도해 병 전체를 치료하려는 발상과 다를 바 없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이념과 가치관의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쑥 하나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과연 그것이 헝크러진 교육의 모습을 바로 세울 수 있겠는가.
법을 가지고 교육을 바로잡겠는다는 발상 자체도 문제이지만, 이왕 법을 논하자면 교육법 전반에 걸친 검토와 여론 수렴이 선행된 후에 사학법의 문제점을 논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교육의 양극화나 평준화 정책, 전교조 교사들의 편향된 이념교육, 학생 수의 감소, 교사들의 실력 향상이나 처우 개선 등의 제반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사학법 개정이 거론된다면 누가 이의를 제의할 수 있겠는가.
평소 이 같은 교육 문제는 늘 뒷전으로 돌려놓던 정부가 기습적으로 사학법을 강행처리하면서 교육 문제를 바로잡겠다고 하니 그것의 필요성을 느끼는 국민들마저도 불신하고 반발하는 것 아닌가? 사학법 개정의 실효성을 믿는 이들의 스승은 누구였을까?
최병현 호남대 영문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