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장에는 온통 흰 염소 뿐이다. 희한한 것은 염소가 ‘사람 놀이’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글라스를 쓴 채 스포츠카를 모는 염소, 기차역에서 군에 입대하는 남자 친구를 배웅하는 염소, 담배를 피우고 포도주를 마시는 염소, 히틀러를 꽉 물어 물리치는 바람에 영웅이 된 염소…. 흰 염소는 사람이 하는 것은 다 한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도 염소와 함께 신이 난다. “얘, 저것 좀 봐. 염소가 거품 목욕도 해.”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 상’에서 열리고 있는 조각가 한선현(39)씨의 ‘흰 염소의 전쟁 그리고 평화’ 전.
이번 전시회에 한씨는 흰 염소를 주인공으로 하는 나무 부조(浮彫) 60점과 환조(丸彫) 4점을 내놓았다.
인간 세상의 일상적 생활을, 인간 대신 염소를 사용해 표현했을 때는 뭔가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있는 것 아닐까.
하지만 한씨의 답은 그런 평범한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예술이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것을 우연하게도 관람객들이 좋아해 준다, 그러면 최고지요. 관람객들의 웃음. 그게 제겐 힘입니다. 심각한 건 별로예요. 작품 속에 묘사된 전쟁이 무슨 의미냐구요? 너무 깊게 생각하거나 묻지 마세요. 저도 잘 모르니까요. 그냥 번뜩번뜩 떠오르는데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는 상상력에 목말라 있는 작가다. 작품을 준비할 때, 상상력의 부재에 허덕일 때 그는 늘 아이들을 생각한다. 아이들은 어떻게 볼까, 어떻게 느낄까….
그게 그는 가장 궁금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을 때, 그는 몇 달간 이제 여덟살 난 한 남자 아이와 ‘계약’을 맺은 적이 있다.
그가 “생각하는 돼지”하고 말하면, 그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생각나는 대로 그리는 식의 작업을 했다. 그런 방식으로 아이의 순수한 아이디어를 샀다.
한선현씨의 상상력은 1996년 발원하기 시작했다. 선배를 따라 이탈리아로 2주간 여행을 갔다가 북서부의 작은 도시 카라라를 보고 한 눈에 반했다.
그가 반한 것이 또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카라라에서 활동하던 목조 장인인 메스트로 클라디오 치아피티의 작품과 장인 정신이었다.
이후 그는 목조각에 심취하게 됐다. 한국에 돌아왔다가 카라라로 유학을 떠난 그는 미켈란젤로, 헨리 무어 등 세계적인 작가들이 작업했다는 카라라 아카데미에서 치아피티로부터 나무깎기를 배우고 삶의 에너지를 충전했다.
그는 전시회 기간 중에는 아예 작업실에 나가지 않는다. 매일 전시장에 나가 관람객들을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눈다. 관람객들과의 직접 대면을 통해 또 하나의 상상력을 그는 이끌어낸다.
“상상력의 부재가 한국 미술 교육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미술을 어렵게 여기지요. 미술을 결코 어렵지 않아요. 외국 음식이 처음부터 맛있나요? 자꾸 먹다 보면 맛있는 거죠. 자주 전시장에 가세요. 자꾸 보다 보면 알게 됩니다. 작품은 전시장에 걸리는 순간 관람객이 마음대로 해석하는 겁니다.”
‘미술도 이렇게 쉬운 거구나’라고 느끼고 싶다면 그의 전시회에 들러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한씨는 108페이지 분량으로 동화책처럼 엮은 전시도록의 판매 수익금 15%를 ‘북한 젖 염소 보내기 운동’에 기부할 계획이다.
27일까지 (02)730-0030
조윤정기자 yjch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