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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조선 투정꾼이 우의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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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 '조선 투정꾼이 우의정에?'

입력
2006.01.14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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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말 최소사집 윗방에서는 희미한 석유 등잔 밑에 네 사람이 상투를 마주 모으고 앉았다. …“자들 까라고.” “서시(여섯끗).” 돌쇠는 성선이 앞에 놓인 돈을 좍 긁어 들였다.

완득이가 석 장을 까놓는 것이 일육팔 진주(다섯끗)였다. “난 일곱끗이야” 하고 응삼이도 석 장을 까놓으며 머리를 긁는데 돌쇠는 거침없이 응삼이 앞에 놓인 돈도 소리개가 병아리 움키듯 집어 들이면서 “청산만리일고주(靑山萬里一孤舟) 칠칠오 돗대 갑오(아홉끗) 흔들거리고 떠온다.” 툭 제끼는데 그것은 분명히 오칠칠 갑오였다. 응삼이는 두 눈이 툭 벌거졌다.’

소설가 이기영이 1935년 발표한 ‘서화(鼠火)’에는 당시 투전(鬪錢)판의 모습이 눈에 잡힐 듯 하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나 나도향의 ‘뽕’처럼 당시 소설은 이런 노름판 풍경이나 노름꾼을 작품의 에피소드나 캐릭터로 흔하게 다뤘다. 예나 지금이나 노름은 생활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고, 생활사의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별로 조명된 적은 없지만).

유승훈(36) 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쓴 ‘다산과 연암, 노름에 빠지다’는 아마도 고금의 우리 문화 속에 나타나는 도박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저작물이 아닐까 싶다.

문화사나 민속사 연구는 갈수록 더 구체적인 주제를 지향하지만, 어쩐 일인지(특히, 대중적인 관심사를 고려한다면 의아할 정도로) 노름을 본격으로 다룬 경우는 드물었다. 책이 빈틈없이 완정한 체계를 갖추었다거나 밀도 높은 자료 수집으로 빛난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시도만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이 책은 출판사에서 의미 부여한대로 한국사 속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들의 발견’이다.

책은 우선 멀리 신라시대부터 현대까지 우리 민족이 어떤 노름을 즐겼고, 기록으로 남아 있는 노름과 관련된 사건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살피고 있어 흥미롭다. 노름이란 원래 승패를 가리는 놀이에서 출발했다고 보는 관점까지 포함, 저자는 놀이 문화 중에서도 우연을 이용해 즐기는 것까지도 이 범주에 포함했다.

신라 시대 최상류 귀족들의 연회장이었던 경주 안압지에서 발견된 주사위는 당시의 놀이 문화가 지금과 별로 다를 게 없다는 점에서 놀라울 정도다. 1975년 찾아낸 이 목제 주사위는 4각형이 6면, 3각형이 8면인데 각 면에는 벌칙일 것으로 추정되는 문구가 새겨 있다.

술 세 잔 한 번에 마시기(三盞一去), 혼자 부르고 혼자 마시기(自唱自飮), 노래 없이 춤추기(禁聲作儛), 시 한 수 읊기(空詠詩過), 얼굴 간질여도 꼼짝 않기(弄面孔過) 등이다. 고려에서 조선 초까지 유행했던 격구(擊毬)도 내기를 걸었던 까닭에 단순한 운동 경기가 아니라 도박으로 이어지기가 단사였다. 유 학예연구사는 “당시 유흥 풍속과 놀이 문화의 발전은 귀족 계급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다”며 “계급의 분화, 귀족 문화의 발전, 통치 계급의 부패 등이 도박이 발전하는 원인”이라고 풀이했다.

너댓 명이 둘러앉아 말판이나 종잇장을 들고 돈따기를 목적으로 벌이는 본격적인 노름은 조선 시대부터 유행했다. 주사위 두 개를 던진 뒤에 나온 수만큼 말을 움직여 승부를 가리는 쌍륙(雙六), 조선 후기 도박꾼을 사로 잡았던 투전, 일제 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우리 생활에 깊이 뿌리내린 화투는 가볍게 즐기면 놀이고, 돈이나 재물 따위를 걸고 승부를 다투면 진짜 도박이다.

당대를 풍미했던 이런 노름은 모두 단순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판에 끼어드는 사람의 관심이 거기에 거는 돈이니까 복잡해 봐야 머리만 아플 뿐이고, 승부가 간단하게 나면 판이 빨리 돌아서 또 좋은 법이다.

에피소드가 많다. 조선 성종 21년(1490년)에는 태조와 태종, 왕비의 위폐를 모신 사당인 문소전(文昭殿)의 종들이 술내기로 쌍륙을 하다가 싸움이 나 불이 난 사건이 있었다. 요즘 ‘타짜’에 해당한다고 할 18세기 투전의 국수(國手)는 원인손(1721~1774)이다. 예조판서 원인하의 아들인 인손은 소싯적에 투전에 빠졌지만 이후 우의정까지 지내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투전꾼들의 추앙을 받은 인물.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의 재주가 어느 정도인가를 시험해 보려고 투전패 중 인장(人將)을 몰래 감추고 나머지 투전패만을 쥔 채 그 중에서 인장을 뽑지 못하면 매질하겠다고 호통을 쳤더니, 패를 이리 저리 만져 본 인손이 “이 속에는 인장이 없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은 한 편지글에서 기생들과 노름을 벌여 3,000전을 뿌리며 논 이야기를 했고, 연암 박지원은 편지를 쓰다 문장이 막히면 혼자서 왼손과 오른손을 양편으로 삼아 쌍륙을 쳤다고 한다. 을사오적의 한 사람인 이지용은 나라 판 돈으로 한꺼번에 수만 원씩 판돈을 건 ‘희대의 화투 대왕’이었다.

책 끝에서 저자는 도박에 얽힌 ‘흥미로운 일상의 역사’를 복원한다는 당초 취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수많은 도박꾼들로 법석거리’로 세상에 한 마디 메시지를 던진다. 저자는 “현대에 들어서는 도박의 시장이 국가 권력의 용인 하에 비대해지고 있으므로 그 위험성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마당”이라며 “도박으로 인한 폐단 역시 개인의 문제이기보다는 엄연히 사회적 문제”라고 환기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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