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쿠시마(福島)에 사는 주부 나가사와 히로코(50)씨는 ‘욘사마’ 배용준씨의 광적인 팬이다. 그는 지난해 8월 강원 삼척시를 찾았다. 그곳에서 나가사와씨는 영화 ‘외출’을 촬영 중이던 배씨 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따뜻한 정(情)을 만나고 느꼈다. 길을 가다 넘어져 멍이 든 그녀에게 식당 주인은 “고기를 상처에 붙이면 멍이 빨리 없어진다”고 알려줬고, 그는 정육점을 찾았다. “정육점 주인은 물론 동네 아저씨, 아줌마들이 ‘소고기를 붙여야 낫는다’고 일러주면서 마치 자기 일처럼 걱정해줬어요. 정말 따뜻하고 정이 넘쳤어요.”
한국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받아들였던 한국인들에 대한 이미지들이 그런 구체적 체험과 결합하면서 그는 한국을 재발견하게 됐다. 이 강력한 ‘서사’ 앞에서는 여자를 함부로 때리고 싸움을 좋아하는 것처럼 오도된 한국인에 대한 인상도, 한국 사회에 대한 일본인들의 철저한 무지도 힘을 잃고 만다.
20세기 한국은 ‘관광 빈국’이었다. 잦은 전화(戰禍)로 외국인들을 매혹시킬 만한 역사적 유물은 사라졌고, 동남아 곳곳에 포진한 대규모 휴양단지 같은 시설도 없었다. 그러나 한국 대중문화 콘텐트가 아시아에서 바람을 일으키면서 21세기 한국은 관광 부국이 될 수 있는 문화자원을 확보했다. 가장 선진화한 관광 형태로 꼽히는 ‘스토리텔링 관광자원’이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명물인 스페인 계단을 거닐며 영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을 떠올리고, 일본 니가타(新瀉)현 에치고(越後)의 유자와(湯澤) 온천을 거닐며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을 떠올리듯 드라마 ‘겨울연가’를 본 아시아인들은 이제 춘천 남이섬에서 순정한 사랑을 반추하고 있다.
그러나 효과적인 자원 분배와 활용은 이뤄지고 있지 않다.
지난해 18만 명의 아시아인들이 방문한 경기 양주시 양주읍 만송리 ‘MBC문화동산’에 있는 대장금 테마파크는 남이섬 등 ‘겨울연가’ 촬영지에 버금가는 한류 관광지가 됐다. 하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한국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없다. MBC가 상하수도 설비에 관한 허가를 양주시로부터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패키지가 아닌 개인여행일 경우, 의정부 터미널에서 버스를 두번씩이나 갈아타고 길을 물어물어 찾아가야 하는 불편함까지 감내해야 한다.
지난해 대장금 테마파크를 다녀온 태국 1위의 드라마 수입업체 아미고사의 두싯 쿱탄로 이사는 “서울에서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려 진절머리가 났다”며 “게다가 대장금 테마파크 외에는 볼 거리가 없어 실망했다”고 말했다. 최인호 백상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스토리텔링 관광은 그 효과가 3년 이상 가기 힘들다”며 “긍정적인 체험을 통한 ‘개인적 스토리텔링화’ 과정이 보태져야 효과가 지속되지만, 현재로서는 관광 인프라 부족으로 오히려 부정적인 느낌만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비판했다.
관광산업에 대한 인식과 정책적 배려도 부족하다. 관광 선진국인 태국은 국왕 즉위 60주년이 되는 2006년을 ‘방문의 해’로 정하고 외국인 관광객 1,300만 명 유치를 목표로 뛰고 있다. 2010년 관광객 유치 목표를 1,000만 명으로 잡고 있는 한국에 비해 훨씬 앞서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숫자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관광에 대한 마인드다. 싸씨 쑤콘타랏 태국관광청 서울사무소 소장은 “우리가 주력하고 있는 ‘의료 관광’의 경우, 보건복지부에서 기획하고 의료기관과 관광청이 이를 뒷받침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며 “음식 관광 등 다른 분야도 각 부처와 민간 기업의 긴밀한 협조 아래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스타를 빼닮으려는 얼굴 성형이 아시아를 휩쓸고 있는데도 ‘의료 관광 허브’에 대한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이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싱가포르 인도 태국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수를 늘일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랄 수 있는 중국과 일본을 잇는 동북아 패키지 관광상품 개발도 국경 이동의 어려움과 일본, 중국 측의 미온적인 태도로 벽에 부딪쳐 있다. 유럽 패키지 여행과 마찬가지로 삼국을 동시에 여행할 수 있는 ‘동북아 패키지’ 개발은 관광 선진국인 일본과 엄청난 역사 유물, 저렴한 가격으로 무장한 중국의 틈새에서 한국 관광의 활로가 돼줄 수 있는 상품이다.
한국관광공사가 2006년 스토리텔링 여행 강화와 함께 주된 목표로 삼고 있는 아시아 기업들의 ‘인센티브 관광’ 유치도 탄력을 받지 못하고 있다. 기업이 직원들에게 보너스 형태로 제공하는 인센티브 관광은 연회 개최 등 유발 효과가 큰 관광상품이다. 인센티브 관광에는 기업체 견학과 방문 일정이 필수 코스로 포함되지만 대기업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한국관광공사 한류연구팀 정진수 과장은 “일부 대기업들이 산업 기밀 유출과 관계가 없는 홍보관조차 견학을 불허하는데, 이는 기업과 국가홍보 효과를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이라며 “한류를 등에 업고 관광 산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 절실하다”고 지적했다.
스토리텔링 관광이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 속에 등장한 장소를 찾아가면서 작품을 통해 공유했던 상상력과 감성을 재확인하고 이를 개인적 체험을 통해 자기만의 서사와 결합해가는 여행 방식.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 지자체, 영화·드라마 세트 유치戰
한류 바람을 타고 스토리텔링 관광 효과가 뚜렷해지자 지방자치단체들이 앞다퉈 영화ㆍ드라마 세트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2005년 최고 흥행 영화 중 하나인 ‘웰컴 투 동막골’의 세트장에 1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모인 강원 평창군의 사례처럼 파급력이 워낙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임기중 자신의 업적을 손쉽게 드러낼 수 있는 사업이라는 점도 세트장 건설 붐 조장에 한 몫을 하고 있다.
백제 시대 유물과 사적지가 남아있는 충남 부여군과 전북 익산시는 각각 60억 원과 20억 원을 들여 SBS가 방영 중인 대하 사극 ‘서동요’의 세트를 지었다. 전남 순천시는 43억 원을 투자해 SBS가 21일부터 방영하는 ‘사랑과 야망’ 세트를, 전남 나주시는 80억 원을 들여 MBC가 방송할 예정인 ‘삼한지-주몽편’ 세트를 건설하고 있다.
오픈 세트 유치로 관광객 유치에 성공했던 지자체의 움직임은 더 활발하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세트 장소로 알려진 경남 합천군은 55억원을 투자, KBS 1TV의 시대극인 ‘서울 1945’의 세트를 건설하고 있다. KBS 1TV ‘태조 왕건’과 ‘무인시대’ 세트를 통해 300만 명의 관광객 유치 효과를 본 경북 문경시는 65억원을 들여 SBS가 100회 이상 방영할 예정인 ‘연개소문’ 세트를 건설한다. 전북 부안시도 KBS 1TV ‘불멸의 이순신’과 영화 ‘왕의 남자’ 촬영지로 사용된 부안영상테마파크와 별도로 8억원을 지원해 SBS ‘프라하의 연인’ 세트를 지었다.
그러나 드라마나 영화가 흥행에 실패한 경우 관광객 유입 효과는 기대할 수 없다. 충남 태안군이 남면 몽산리 폐염전 일대에 1만5,000평 규모로 지은 ‘장길산’ 세트장과 충남 금산시의 ‘상도’ 촬영장은 방문객의 발걸음이 뜸한 상태다. 효과가 있다 해도 지속 기간은 짧다. 실제 강원도와 횡성군에서 39억 원을 투입한 SBS ‘토지’ 세트도 드라마가 끝난 2005년 7월 이후에는 관광객 수가 급감했다.
다양한 교통편 제공과 편의시설 확충, 체험 프로그램 및 주변 관광지와 연계한 상품 개발 등의 장기적 전략 없이 이뤄지는 지자체의 세트 건설은 한류를 체험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실망감만 안겨주고 있다.
김대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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